day-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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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중요한 프로젝트가 실행되는 날이었다. 나는 30분 정도 일찍 출근해서 필요한 준비들을 했다. 이미 전날도 전전날도 계속 준비해온 것이었다. 그런데 불행의 징조는 어제 오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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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명 가까이 테스트를 했을 때도 문제가 없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제 우리 팀 40명에게 실행을 해봤더니 오류가 난다는 사람들이 나왔다. 두 명이나 있었고 몇 번이고 오류가 재현되었다.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오류 화면을 동영상으로 촬영하려고 핸드폰을 들고 두 명의 자리로 갔다. 그런데 갑자기 잘 되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했다. 뭔가 일시적인 오류겠지. 그리고 설정 변경 때문에 잠시 튕겼을 거라고 합리화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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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제 준비한 대로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일찍 나와서 내 조직의 리더에게 테스트를 보냈다. 거기서는 또 처음 보는 에러가 발생했다. 점점 여유를 잃기 시작했다. 어제와 같은 오류가 오전에 또 제보되었다. 그 사람의 오류는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동영상을 촬영했다. 관련된 부서 여기저기 문의도 하고 외부 시스템을 쓰고 있어서 해당 회사에도 문의를 보냈다. 영어로만 보낼 수 있어서 여유 없는 와중에 구글 번역기까지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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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이유는 사실 커피 한 잔 때문이다. 나는 오전에 혼비백산하는 와중에 라떼 한 잔을 샀다. 오류를 제보해준 사람에게 동영상을 찍으러 갔는데 회의 중이라서 잠깐 사내 카페에서 라떼를 주문했다. 그리고 그걸 자리에 가져왔다. 정신없이 문제 해결을 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오늘 점심은 스터디를 하면서 밥을 먹기로 한 날이다. 가서 김밥을 먹으면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음료를 한 잔씩 주문해서 먹었는데, 그때 갑자기 아침에 산 커피 생각이 났다. 어 내가 커피를 사다 놓기만 하고 어쨌더라?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 사다 놓고 정신없어서 못 마셨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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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가 끝나고 자리에 돌아갔다. 거기에는 노란 종이컵에 흰 플라스틱 뚜껑이 닫힌 라떼가 보였다. 이제 다 식어서 못 먹겠네, 하고 컵을 들어 올렸다. 빈 컵이었다. (동공지진) 전혀 마신 기억이 없다. 따듯한 것이 입에 닿은 기억도 없고 커피를 마시고 난 후의 텁텁함 같은 것도 입안에 없었는데! 하지만 빈 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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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을 배울 때 마음챙김 양치질을 하던 습관이 떠올랐다. 양치질을 할 때 양치질에만 집중하는 연습이다. 나는 다른 생각들을 지우고 양치질만을 한다. 그 연습하다가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봤다. 나는 그 옷이 배에 큰 곰이 그려진 옷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곰 옆에 너구리 꼬리도 있고, 오리도 있고, 물고기도 있고, 심지어 물에 빠진 채 발만 튀어나온 동물도 있었다. 사람 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잠수 중이거나 아니면 죽은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해괴한 그림들이 있는지 전혀 모르고 가운데 곰만 보고 있었다는 게 무척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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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좀 더 잘 알았으면 좋겠다. 오전의 멘탈 털린 시간의 기분은 설명하라고 해도 정신이 없었다는 것밖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나는 익숙한 내 컴퓨터 앞에 글을 쓰며 따듯한 차를 마시고 있다. 열린 창문으로는 시원한 가을밤의 공기가 살랑살랑 들어온다. 오른발에 바람이 느껴진다. 옆에서 나와 다른 키보드 소리를 내고 있는 남편이 시야에 들어온다. 멀리서 엔진 소리가 난다. 예전에 저런 게 다 오토바이 소린 줄 알았는데 요즘은 차에서도 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창문을 열어두면 이렇게 바깥소리가 들리는 것이 좋다. 바깥의 큰 세상과 연결된 느낌이 든다. 이것이 나의 현재,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렇게 저녁도 조금 더 곱씹어 보면서 여유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