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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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된 친구들이 새롭게 보일 때가 있다. 최근에 여러 번 그런 적이 있었다. 결혼에 목말라하는 친구가 신기했다. 친구 집에 가봤는데 오래전부터 결혼하면 쓰려고 사모아둔 냄비며 그릇이 많았다. 그걸 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친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쓸모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 같아서 읽을거리를 챙겨 둔다고 했다. 그 친구는 한 때 시험 전날 노래방에 가서 공부할 책을 두고 온 적이 있었다. 노래방이 아침에 열지 않아서 혼비백산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시절 꽤 여유가 있어 보였던 친구가 그렇게 말한 것이 의외였다. 집에 놀러 온 친구는 잉여로운 시간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했다. 인스타를 보면 여행도 잘 다니고 매일 운동도 하는 친구였다. 친구는 회사 갔다 집에 오면 나를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그것이 견디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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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에게 생각하지 못했던 면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내가 타인에게 너무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시절 나는 친구가 많았다. 그리고 그 관계를 적극적으로 붙들고자 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친구들을 만났다. 그래서 나의 달력은 늘 약속으로 빼곡했다. 나는 주 단위로 그려진 다이어리를 썼다. 2주간은 약속이 늘 차있었다. 사람들이 얼굴 보자고 하면 나는 대답했다. 2주 전에 연락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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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어쩌면 스쳤다고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고, 또 남 이야기를 많이 하기도 했다. 그것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느냐고 물어보면 아마 대부분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매일매일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야 했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집중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십 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들의 모습이 새로운 것이 한 편으로 나의 부주의인 것 같아서 미안해진다. 관계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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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맙게도 친구들은 나의 입장을 빨리 공감해준다. 특히 내가 회사에서 쭈구렁 하게 있는 상태에 대해서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많다. 일을 안 하고 매일 칼퇴해도 힘든 마음도 알아주고, 일을 못한다는 수렁에 갇힌 마음이 어떤 것인지도 알아준다. 차가 쌩쌩 다니는 8차선 대로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면서 요즘 별로 안 바쁘다가 최근 갑자기 며칠 바빴어,라고 말했다. 친구는 바로 그렇게 안 바빠도 힘든 거 내가 알지,라고 말해주었다. 와 너 아는구나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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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친구들이 다들 성실한가 봐요,라고 말했다. 그렇다. 내 친구들은 다들 성실한 분자들이 많다. 다들 왜 이리 성실해서 스스로 자기를 괴롭히고 난리인가. 안타깝지만 나도 약간 그런 분자에 속한다. 남편은 저는 일 년 동안 그냥 놀았는데 너무 좋았어요,라고 덧붙였다. 이제 잉여롭게 잘 사는 사람과 함께 사니까 나도 좀 더 잉여롭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오늘 친구와 함께 대화를 하면서 잉여짓도 역량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안전하게 살면 혹시 120살까지 살지도 모르는데, 나의 생활을 새롭게 가꾸는 방식을 알아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