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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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리포터 세대다. 산타를 만나겠다고 오빠랑 서로 깨워주자고 약속해도 밤을 새지 못했는데, 새로운 해리포터 시리즈가 나오면 밤을 새워 읽었다. 처음 해리포터 영화가 개봉할 때는 중학생이었다. 당시에는 CGV 같은 프랜차이즈 영화관도 없었다. 동네의 영화관에 친구와 함께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호그와트의 움직이는 계단, 천장이 하늘로 된 식당, 말하는 초상화 같은 것들을 실제로 보고 무척이나 황홀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2
해리포터의 광팬이라면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해리포터에 나온 주문을 실제로 외워보기. 진짜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한 번쯤 소리 내 말해보았을 것이다. 나도 그런 적이 있다. 해리포터 이후에 다시 초능력 뽐뿌를 넣은 책은 '연금술사'였다.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널 도와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주인공은 순간 이동에 성공한다. 책을 읽고 나서 나도 주인공처럼 시도해 본 적이 있다. 부끄럽게도 그것은 대학교 때의 일이다. 잠이 오지 않던 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순간이동을 시도했다. 가고 싶은 곳을 떠올리고 나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 우주를 불렀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어두운 내방에 그대로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될 리가 있나.
3
여전히 판타지물을 좋아한다. 상당히 많은 웹툰을 보는데 그림이 예쁜 판타지 만화는 일단 첫 화를 열어보는 편이다. 그런데 요즘 판타지물 아닌 판타지 만화가 하나 있다. <이태원 클라쓰>라는 웹툰이다. 이 만화를 보러 가면 이런 댓글을 볼 수 있다. 제가 이 만화를 결제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돈이 아깝지 않습니다. 제발 더 결제하게 해주세요!
4
이태원 클라쓰에는 아무런 판타지적 요소가 없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호탕한 전개 때문에 판타지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은 돈도 빽도 없는 고등학교 중퇴자다. 누군가 주인공의 스펙을 현실에서 듣게 된다면 인생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사람이 현실을 제패하면서 목표를 달성해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현실의 판타지는 그런 일인가 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 갖고 싶은 것을 다 갖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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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에 대한 욕심이 크게 줄어들면서 언젠가부터는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졌다. 나도 더 이상 초능력이 필요하지 않다. 다만 어떤 능력들은 더 갖고 싶다. 만들고 싶은 것을 더 정교하게 만들어 내는 능력. 선입견 없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을 줄 아는 능력. 다른 사람이 상처받지 않도록 말할 수 있는 능력.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기 쉽게 쓸 수 있는 능력. 다행히 이런 것들은 초능력이 아니라서 갖고자 시도해볼 수 있다. 물론 시도해 보고 나서 피식 웃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런 게 될 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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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괜찮다. 사는 건 시간을 소비하는 거니까.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쓸 거다. 그러고 보니 오늘 회사에서 사람들이랑 그런 말을 했었다. 상황에 맞게 순응하면 이득이 있다는 걸 누가 몰라서 못하나. 알고도 못하는 거다. 왜냐면 그게 자기 성격이라서. 나를 죽일 수 없으니까,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