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38
1
긴 연휴가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이 연휴를 십 년 전부터 기다려 왔다고 했다. 2017년에 이런 기가 막힌 연휴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때까지 회사 다니면 저 연휴를 누릴 수 있겠군, 하면서 기다려 왔다는 것이다. 물물 교환을 하는 사내 장터 게시판에는 많은 사람들이 외화를 사고 있었다. 유로, 달러, 엔, 프랑, 홍콩 달러 등등 종류도 다양했다.
2
인천공항 사진은 예상대로였다. 바닥 대신 사람 머리로 꽉 채워진 공항 사진이 기사에 실렸다. 올해 나에게 여행이 부족했다면 아마 나도 그 인파 중에 한 명이 되어서 어딘가로 떠났겠지. 요즘은 여행보다 여유로운 시간이 좀 더 간절하다. 그래서 별 다른 여행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다. 대신 여유가 있을 때 해보고 싶었던 일들이 잔뜩 줄을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3
연휴 중에 가장 중요한 일정은 결혼 후 첫 명절을 맞아 시댁과 친정을 방문하는 일이다. 어제 회식 때 시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추석 전날 시댁에 와서 밥을 먹고 가라고 하셨다. 회식이라 신나서 기분이 좋은 바람에 덜컥 잡채를 해가겠다고 선언했다. 이제 와서 처음으로 해보는 잡채가 맛이 없을까 봐 걱정이 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시어머니에게 잡채 한 번도 안 해봤다고 솔직히 말은 해두었다. 어머니는 두 번이나 안 해도 된다고 하셨는데 나는 굳이 굳이 해가겠다고 세 번이나 말했다. 왜 그랬을까.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나의 모든 재량권을 삭제하고 레시피가 명령하는 고대로 만들어 봐야겠다.
4
두 번째로 중요한 일정은 창고방을 정리하는 일이다. 창고방을 이제 쓸 수 있는 방으로 만들 예정이다. 왜냐하면 연휴가 지나면 재봉틀님께서 우리 집에 오시기 때문이다. 분명 공방의 선생님이 추천한 모델명은 맨 마지막 숫자가 10으로 끝나는데, 나는 뒤가 900으로 끝나는 모델을 구매하고 말았다. 언제 회사 그만둘지도 모르는데, 돈지랄은 돈 벌 때 하자는 마음이 결국 지름의 세계로 나를 인도했다. 그래서 창고방에 재봉틀님을 모시기 위해서 미리 준비하려고 한다. 이케아도 한 번 다녀와야 할 것 같다.
5
그리고는 미뤄둔 콘텐츠를 소화하는 일들을 하려고 한다. 언제나 나를 딥슬립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호모데우스도 마저 읽고, 영화 공범자들도 볼 예정이다. 관상책도 올해가 가기 전에 좀 더 보고 싶다. 집 앞에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자전거 대여소가 두 개나 생겼는데 그것도 타보고 싶다. 따릉이 앱을 다운만 받아놓고 한 번도 실행시켜 보지 못했다. 연휴에는 꼭 실행시켜서 따릉이를 타야지!
6
여유로운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놓고 하고 싶은 일 참 많다. 여유로운 시간 보내기 미션은 가능할 것인가! 오늘도 친구네 커플과 집에서 한참 동안 보드게임을 했다. 친구네가 사준 저녁을 잘 얻어먹고 들어오니 밤이었다. 내일은 일어나서 뒹굴거리다 보면 공방에 나갈 시간이 될 것이다. 이렇게 휘릭 휘릭 가는 시간들 사이에서 여유라는 놈과 밀당을 해야 하다니. 연휴가 끝나고 나서 충분한 여유를 느꼈다고 생각되는 시간이 되기를. 해야 할 것들 사이를 건너가는 마음이 아니라, 뭔가를 할 때 그것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