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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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를 하지 않는 편이다. 유독 후회하는 일은 작은 말실수들이다. 입이 성급해서 늘 하지 않았어도 좋을 말이나 무리한 표현을 뱉곤 한다. 입이 성급하면 되돌이키는 뇌도 없었으면 좋을 텐데, 신기하게도 말실수들은 저녁 무렵 스멀스멀 떠오른다. 이 말은 내가 너무 심했나. 어떤 말은 마음에도 없던 말이었는데 했네. 혹시 상처받지 않았을까. 퇴근길의 노을을 보면 하루의 잘못한 이야기들이 너울너울 떠오른다.
2
공자는 말이 많으면 군자가 될 수 없다고 생전에 단언하였다. 하지만 타고난 입인 걸 어떡하나. 어렸을 때부터 잔망스러운 말재간으로 귀여움을 받았다. 동갑내기 부모님은 집에서 티격태격 싸웠는데, 동네에 큰아빠, 큰엄마라고 부르는 이웃사촌이 있었다. 그 부부는 나를 만나면 요즘도 엄마 아빠 싸웠냐고 물어보곤 했는데 대여섯 살 먹은 내가 아주 속상해 죽겠다니까요,라고 대답하는 통해 다들 박장대소했다고 한다. 그렇게 허풍쟁이가 탄생했다. 지금도 과장된 표현이나 강조된 표현, 자극적인 화법이 내 말하기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3
그런 자잘한 하루의 반성 말고 가끔 후회되는 일이 하나 있긴 하다. 그건 진로선택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두 개 대학에 합격했다. 합격한 학교의 네임밸류는 비슷했지만 전공분야가 전혀 달랐다. 하나는 상경계열이었고 다른 하나는 연극영화과였다. 담임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너 연극영화과 지원했니? 네 맞아요. 나는 동명이인인 줄 알았잖아, 깜짝 놀랐다. 하지만 정작 선생님보다 더 놀란 사람은 우리 엄마였다. 엄마는 연극영화과를 지원하는 줄 알았다면 시험 응시비용을 주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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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의견도 두 패로 갈라졌다. 논술 학원을 같이 다닌 친구들은 연극영화과가 있는 학교에 대거 합격했다. 그 친구들은 여기 와서 같이 놀자고 나를 꼬드겼다. 논리적인 친구는 내가 합격한 경영대는 기껏해야 스카이 다음이지만 연극영화과는 그 학교가 국내 최고라며 연영과를 가라고 말했다. 그 무렵 나는 매우 쫄아 있었다. 지망하던 1순위 학교에 합격했으나 기쁨은 잠시고 가서 꼴등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연극, 영화에 관련된 취미나 지식이 거의 전무했다. 실기시험이 없는 전형으로 합격해서 연기를 해본 적도 없었다. 자존감이 바닥인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냥 먹던 밥 계속 먹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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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경계열로 진로를 정한 나에게 담인 선생님은 말했다. 니가 연영과를 가서 10년 배고프게 살다가, 일약 스타덤에 탁 오르면서 지금의 제가 있었던 것은 저희 고삼 때 담임선생님 덕분입니다, 이렇게 인터뷰를 딱 해주면 진짜 아름다운 스토리가 나올 텐데. 고등학교 선생님을 하는 일이 적성에 안 맞는다는 담임의 너스레에 킥킥 웃었다. 그렇게 나는 경영학을 전공해서 회사원이 되었다. 사실 연영과에 갔더라도 회사원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인생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시절의 선택이 종종 후회가 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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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것은 나만의 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의 소리를 듣고 그것에 충실한 나 자신의 선택을 하는 것. 그런 후회가 들 때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나만의 길을 가야지. 내가 하고 싶은 선택을 하고 후회 없이 살아야지. 간혹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한다. 언젠가는 부모님도 형제도 남편도 나도 죽을 것이다. 그 시간을 어떤 방식으로 채우더라도 죽고 나면 모든 의미가 소멸한다. 그러니까 괜찮은 것 같다. 이래도 저래도 소멸인데 나는 그 시간을 풍요롭게 채우고 나만의 행복을 누리다 죽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