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47
1
남편은 숙취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다. 일생 동안 술을 마시지 않다가 나랑 연애를 하면서 야금야금 술을 마시게 되었다. 살다 보면 술 때문에 실수한 에피소드가 한두 개쯤 있기 마련이다. 서로 내가 더 심한 거 있어, 하면서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남편에게는? 그런 것 없다. 대신 남편에게는 그런 무용담이 있다. 술을 먹이려고 하는 사람들의 강요를 얼마나 단호하게 거절해봤는지 따위의 무용담이다. 남편이 다녔던 회사 중에는 현대의 계열사도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서도 한 마디로 딱 잘라 술을 먹지 않는다고 말하고 집에 갔다던 사람이었다.
2
남편이 술을 먹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간혹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막걸리가 무슨 맛인지 모른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그랬다. 마침 우리는 전주에 놀러 와 있는 참이었다. 막걸리를 색깔만 알고 맛은 모른다니. 어떻게 이런 한국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거지. 남편에게 막걸리 맛을 보여주기 위해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켰다. 반 정도 남기고 나왔지만 남편에게 막걸리 맛을 알려줄 수 있어서 뿌듯했다. 남편은 막걸리에서 신 맛이 나는 것이 인상적이라고 했다. 초등학생에게 방학숙제를 클리어 시키는 기분이 들었다.
3
남편은 딱히 술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랑 조금씩 마시는 건 즐거워했다. 왜 술을 안 마시는지 꼬치꼬치 물어보자 '정신이 흐트러지는 것이 싫어서요'라는 도인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스무 살에 필름 끊긴 상태로 집에 들어가던 나에게는 알쏭달쏭한 말이다. 신혼여행으로 찾은 두 번째 도시는 싱가포르였다. 거기에는 남편의 고등학교 친구가 살고 있었다. 결혼식에 못 가서 미안하다며 남편의 친구가 저녁을 샀다. 거기서 셋이 맥주 한 잔씩 마셨다. 남편의 친구는 반색을 했다. 너 이제 술을 먹니? 이제 한국 돌아가면 같이 술 마실 수 있겠다!
4
남편의 친구들은 만나면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신다. 결혼하고 사람들이 남편에게 용돈을 얼마를 주는지 묻는데, 남편에게는 그다지 돈 관리가 필요 없다. 대부분의 소비는 주유소와 교보문고에서 이루어진다. 아 그리고 커피 관련 소비가 있다. 밖에서 술을 마시는 일이 없기 때문에 남편의 소비는 단출한 편이다.
5
그런 남편이 가끔 땡긴다고 하는 술이 있다. 바로 포터다. 에일 종류와 비슷한 맥주인데 커피 향 같은 깊은 풍미가 있다. 맥주를 좋아하는 나 때문에 남편도 술을 맥주로 입문하게 되었는데, 술을 마시게 되자 남편이 한 일은 맥주에 대한 책을 사서 보는 것이었다. 4만 원 가까이하는 컬러로 된 맥주 소개서였다. 4만 원이 있으면 맛있는 맥주를 댓 병은 사고도 남을 돈인데... 책을 읽은 남편은 나도 모르는 맥주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6
집안 친척들에게 남편을 소개하는 자리에는 당연히 술이 있었다. 사촌오빠는 술을 따라주기 전에 남편에게 술을 얼마나 잘 마시는지 물어봤다. 남편은 술을 먹지 않는다고 말했고, 사촌오빠는 굳이 권하지 않았다. 이모들은 술 안 마시면 평생 속 썩일 일 없을 거라고 칭찬했다. 하지만 아빠와 같이 밥 먹는 자리에서 남편은 청하를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이날은 내 남편의 평생 술을 가장 많이 먹은 날로 기억될 것이다. 다행히 남편은 취하지 않았다.
7
이번 명절 시댁에서도 아버님은 소주를, 어머님은 와인을 드셨다. 어머님은 와인을 나와 동서에게도 따라주시고 서방님에게도 주었다. 하지만 남편에게는 먹을 거냐고 묻지도 않으셨다. 지금도 고깃집으로 회식을 가면 아무것도 안 먹고 냉면 한 그릇을 시켜먹는 남편이다. 매운 것도 싫어하는 탓에 친정엄마는 오늘 아침에도 김치를 담아주며 고춧가루를 몇 번이나 망설이며 넣었다. 결국 맛을 보다가 보다가 안 되겠는지 막판에 고춧가루를 대량 투하했다. 이 먹고 마시는 취향 특이한 사람과 매일 저녁 함께 해 먹으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