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취미생활

day-49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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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봉틀을 샀다. 공방에 나갔을 때 선생님은 재봉틀 구매를 권했다. 재봉틀 놓을 공간이 없어서 못 사고 있다는 말에 선생님은 크게 공감해주었다. 미싱을 하려면 옷을 재단할 수 있는 공간과 재봉틀을 놓을 곳이 필요하다. 연휴 시작 전에 재봉틀 구입을 결심하고 창고로 쓰던 방 하나를 열심히 치웠다. 방 가득 있던 물건을 모두 거실로 꺼낸 뒤에 책상을 조립했다. 그 과정도 만만치 않았는데 방에서 나오니 방금 이사 온 집 같은 비주얼이 펼쳐졌다. 고작 재봉틀 하나 놓겠다고 연휴 하루를 꼬박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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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자에게 적당하다고 선생님이 추천해준 모델이 있었다. 하지만 물건의 구매란 이런 수순을 밟는다. 사기 위해 알아볼수록 더 좋은 물건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다음 모델로 건너뛰는 비용은 감수할만한 액수다. 그렇게 서너 번만 눈을 질끈 감으면 내가 사려는 재봉틀 가격은 두배가 넘어간다. 유니클로에서 이삼만 원만 주면 내가 만든 것보다 훨씬 좋은 품질의 옷을 살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원단을 고르고, 패턴을 떠서 재단을 하고, 몇 시간을 바느질하는 공을 들이기 위해서 백 만원 짜리 재봉틀을 사려고 한다. 이건 무슨 고장 난 뇌의 망령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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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된 나의 재봉틀님은 지금 배송 중이다. 중고나라에 들어가 보면 미싱 사놓고 거의 못써서 판다는 글이 많이 올라와 있다. 아마 미래의 나의 모습일 것이다. 그럼에도 무척 신난다. 옷을 만들려면 옷감 끝을 잘라서 마감해주는 오버록 전용 미싱이 필요하다. 이미 나는 그 미싱을 또 사기 위한 중고 검색을 시작했다. 선생님은 좋은 재봉틀을 샀으니 오버록 미싱은 싼 거 사라고 했지만 남편이 악마의 부추김을 넣는다. 이미 부라더로 산거, 나머지도 부라더로 메이커를 맞춰서 놓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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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민이 내 지출을 본다면 뭐라고 했을까. 옷값 이상의 원단 값을 지불하고 있는 나를 보면 스스로도 자괴감에 헛웃음이 나온다. 이제 거기에 재봉 용품까지 사들이게 된 것이다. 공방에서 재단할 때 쓰는 시접자는 얇은 플라스틱으로 된 30cm짜리 자다. 자 한 개가 만 이천 원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잠자리표 재단 가위는 3만 원쯤 한다. 재단할 때 꼭 필요한 문진도 하나에 육천 원이다. 문진은 최소 두 개는 필요한데. 가격보고 놀란 나에게 선생님은 말했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이건 돈이 많이 드는 취미생활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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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돈을 많이 쓰는 편은 아니다. 산 물건 중에 비싼 건 맥북, 스마트폰, 카메라 정도다. 기계에는 어쩐지 돈을 좀 들여도 크게 아깝지 않다. 좋은 기계는 배신이 없는 법이지. 미싱만 해도 그렇다. 버튼만 누르면 바느질하던 실을 스스로 잘라주는 재봉틀이라니. 넘나 기특하지 않은가. 공방이 아니라 재봉틀을 집에서도 돌릴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신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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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원단을 좀 싸게 사보겠다고 원단을 판매하는 카페에 가입했다. 원단을 파는 카페는 주로 다음에 많이 있다. 네이버에도 약간 있긴 한데 다음 카페가 유구한 역사와 회원수를 자랑하고 있다. 원단 카페 중 가장 회원수가 많은 곳은 자기소개 게시판을 운영하고 있다. 자기 소개에는 나이를 묻는 질문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의 소개를 보니 나이 든 분들이 꽤 많았다. 50대도 있고 60대도 있었다. 자기가 만든 에코백을 딸이 잘 메고 다녀서 행복하다는 이야기. 손주 옷을 만들어 준다는 분도 있었다. 온라인 공간에 이렇게 장년층이 많은 곳은 처음이다.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내가 정말 시대착오적인 취미생활을 시작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매번 새 패턴을 그리고 재단을 하면서 역시 옷은 대량 생산이 짱이야,라고 생각한다. 그러고도 또 뭘 만들지 궁리하는 걸 보면 이미 구제불능이다. 아마 한동안 여기에 돈 많이 쓸 것 같다. 버니까 쓰는 거지. 벌 때는 자유롭게 쓰자,라고 위안 삼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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