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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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가장 많이 반복해서 읽은 소설을 기억하고 있다.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이다. 1997년 소설이다. 내가 열 살 때 출간된 책이었네. 열 살에 읽은 것은 아니고 집에 굴러다니는 것을 오 학년 때쯤 읽은 것으로 기억한다. 원래도 울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펑펑 울었다. 그 무렵 동네 구민회관에서는 구민을 위한 복지로 천 원 영화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몇 년 지난 영화를 가져다 천 원에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우연히 영화 <아버지>를 상영할 때 가서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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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버지는 여러모로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주인공인 아버지 역할에는 배우 박근형 씨가 출연하는데, 소설을 읽으며 상상해왔던 아버지 역에 너무나 잘 맞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박근형 씨가 연기를 잘한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보다 더 소름 돋았던 것이 아내 영신의 역할을 맡은 장미희 씨의 아우라 때문이었다. 소설에는 영신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온다. 이십 년 전 읽었던 내용을 어렴풋이 떠올리자면 이런 문구도 있었다. 화려한 보석보다는 진주가 어울리는 여자였다던가. 아내로서 나무랄 데 없지만 묘하게 차가운 구석이 있다고 한다던가 등등. 그런 모든 묘사가 너무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캐릭터였다. 장미희의 예쁘고 기품 있는 얼굴, 도도한 목소리와 말투까지. 소설 속의 캐릭터를 위해 만들어낸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장미희가 연기한 영신의 싱크는 엄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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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소설을 다시 읽으니까 두 배로 더 재밌었다. 영화를 본 뒤 책을 보면 책과 영화를 한꺼번에 다시 보는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너댓 번쯤 더 읽었다. 읽을 때마다 눈물, 콧물을 짜면서. 주인공을 죽게 만든 췌장암에 대한 존재도 그때 처음 알았다. 췌장암이 이렇게 증상이 없고 발견하기 힘든 거구나. 무서운 병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슬픈 이야기를 만든 췌장암이라는 병이 원망스럽고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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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친구가 결혼을 했다. 졸업하고 오랫동안 만난 적이 없어 현실 친구보다 인스타 친구에 가까웠던 사이였다. 우리를 이어 준 것은 아산병원이었다. 나는 남편을 간병하는 중이었고 친구는 종양 치료 때문에 병원을 방문한 참이었다. 친구는 신선한 과일을 먹어야 한다며 과일을 사주고는 사라졌다. 그러면서 자기 병에 대해서 잠깐 설명했는데 종양이 발견된 부위가 췌장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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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에서 혼자 밥 먹을까 봐 갈만한 친구에게 연락을 해봤다. 친구에게서 못 간다는 톡이 날아왔다. 프로필 사진도 심상치 않고 걱정되어 안부를 물었는데, 어머니가 아프시다고 했다. 어머니의 병명은 췌장암이라고 했다. 친구에게 답신을 보내는데 손이 덜덜 떨렸다. 친구 어머니의 쾌유를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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췌장이라는 장기는 대체 어디 매복해 있다가 나타나길래 이렇게 비극적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건지. 검색을 해보다가 스티브 잡스도 췌장암으로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학정보를 보니 특히 췌장에서는 암세포가 빠르게 성장한다는 내용이 있다. 발병하면 수술도 까다롭고 전이도 잘 일어나는 조직이니까 초기 발견만이 살길이라는 식의 설명이 써져있다. 그런 병이면 검진 리스트 상단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대체 무슨 일을 하는 장기인지 봤더니 소화효소도 만들고 호르몬도 만드는 녀석이라고 한다. 점점 더 이상한 기관일세... 매일 쓰고 있는 몸인데 몸속에 대해 아는 것이 참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