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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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차트 1위 곡은 '썸 탈거야'라는 곡이다. 자주 들어온 볼빨간 사춘기의 노래라서 흥얼거리다가 오늘에야 문득 가사가 다른 세대 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한창 연애를 시작하던 대학시절에는 '썸'이라는 말이 없었다. 대신 '밀당'이라는 말이 있었다. 밀당을 한다는 표현은 많이 쓰였지만 밀당남, 밀당녀 이런 식으로 일컫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밀당이라는 말은 '밀고 당기다'는 두 가지 상태의 공존을 의미해서 뭔가 불안정한 느낌을 주었다. 즉 누군가랑 밀당 중이라는 것은 연애 단계로 넘어가기 전의 임시적 상태를 말했다. 나 쟤랑 밀당할거야, 이런 문장은 내 세대에는 없었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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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썸은 뭔가 다르다. 걔랑 나랑 썸이 있다, 라는 것은 뭔가가 있다는 뜻이다. 남자 친구는 없지만 썸남이 있다는 건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안정적인 상태 값이다. 볼빨간 사춘기의 '나 오늘부터 너랑 썸 탈거야'라는 가사가 새삼 신기하게 다가왔다. 보통은 오늘부터 사귄다 아닌가, 오늘부터 썸을 타겠다는 선언이라니. 한편으로는 약간 섬뜩하기도 했다. 사귀는 건 쌍방이지만 썸 타는 건 일방이다. 모든 썸이 연애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가정할 때 혼자 김칫국 사발로 마시면서 썸을 탈 수도 있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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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누가 문찐이라는 말을 가르쳐 줬다. 문화적 찐따, 문화 찌질이, 뭐 그런 뜻이란다. 오늘부터 너랑 썸 탈거야,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잘 못 알아먹기 시작했으니 이제 문찐으로 가는 길에 섰구만... 주말에 친구들과의 대화도 떠올랐다. 길가다가 맘스 키친을 보고서 나 저기 한 번도 안 가봤어, 했더니 친구들은 다 가보긴 했다는 것이었다. 10대 문화를 글로만 배운 내가 몇 년 전부터 맘스키친이 10대 패스트푸드 브랜드 선호도 1위래,라고 했더니 한 명이 놀라워했다. 그 정도야?! 10대들의 브랜드 선호도 1위인데 나는 아직 가보지도 못했어,라고 하니 친구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근데 솔직히 우리가 맘스키친 갈 나이는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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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나는 클럽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하고 삼십 대가 되었다. 어렸을 때는 한 번쯤 가보고 싶었는데 자정이 되어야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말에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집이 경기도고 외박은 절대 안 되는 탓에 대중교통이 끊기기 전에 집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몇 만 원씩 하는 택시비를 뿌리면서 클럽을 가기에는, 그만큼 절박하게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결국 못가보고 클럽 다닐 나이를 지나쳤다. 흥미도 없어졌지만 그래도 한 번쯤 가보면 좋지 않았을까, 싶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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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고 보니 직장 다니면서 대학동창들과 이태원 클럽 같은 곳을 한 번 가보긴 했었다. 맥주를 마시면서 춤도 출 수 있는 술집이었다. 친구들과 춤을 추고 있었는데 어떤 외국이 와서 같이 춤을 추다가 친구들을 막 들어 올리고 그랬다. 왜인지 모르지만 나를 들어 올리지는 않았다. 행색이 초췌해서 필터링 된 것 같지만 날 귀찮게 안하니 괜찮았다. 적당히 놀다가 나가려고 하는데 내 친구의 허리춤을 양손으로 끌어안고 가지 말라고 붙잡는 웬 놈이 있었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라 피곤했는데 친구는 으악하고 소리만 지를 뿐 나오지 못하고 끌려가고 있었다. 나는 남자의 손목을 잡고 대차게 바닥으로 뿌리쳤다. 남자가 만든 올가미가 열리면서 친구가 풀려나왔다. 야무지게 친구 가방까지 챙겨서 나와서 집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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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밤에 술 먹고 생긴 에피소드들도 이제 몇 년 전 이야기가 되었다. 십 년을 숙취로 고생하고서야 이제 간신히 필름 끊길 정도로 술 먹는 일을 절제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즘엔 술 많이 먹은 적도 없으면서 술을 왕창 먹던 과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그거야 말로 되게 나이 든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말이야 왕년에 소주 두 병은 거뜬히 마셨는데 말이지! 이런 말머리로 시작하는 왕년 시리즈를 읊는 것 같다. 널 보니까 어렸을 때 나를 보는 것 같다, 이런 꼰대 같은 발언은 제발 죽을 때까지 하지 않아야 할 텐데.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