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의 빙봉이들

day-58

by Lucie

1

뇌질환이라기 보다는

공황,

공황상태에 가깝다.

무슨 글을 쓰려고 하면 머리가 뒤죽박죽이 된다.

상황을 종잡을 수 없다.

내가 앉아있는 여기가 어딘지

내가 지금 타이핑하고 있는게 무슨 내용인지

내가 보고있는게 뭔지

당최 알 수 가 없다.

무섭도록 생활에 잘적응하는 나란 인간은

또 아무생각없이

나가야 하니까 아침마다 출근을 하고

시키면 해야하니까 시키는 일을 하고

먹어야 하니깐 밥을 먹는다.

학교다닐때는 적어도 밥은 먹고싶어서 먹엇다.

지금은

별로 그걸 먹고싶지 않아도

선택권이 없다.

먹자는데로 따라가서는 내키지 않는

수저질로 먹어야 하니까 먹는다.

학원은 가야하니까 간다.

토익도 봐야하니깐 본다.

사람만나는걸 참 좋아하는나는

어쩌면 사람도 만나야하니깐 만나는지도 모른다.

글쎄

뭐지

보고싶어서 보는건가.

봐야되서 보는건가.

요즘 정말 하고싶은건

유쾌한 친구랑 함께 기분좋게 취해보는 것인데

누구랑 마셔야할지 알수없고

뭘마셔야할지 알수없고

집에 몇시에 들어가야할지 알수 없다

그래서 그냥

가야하는 회사가고 먹어야하는 밥먹으며

정말 말그대로 그냥 살고있다.

요즘 뭐해?

라고 물으면

그냥 살아

라고 답하곤 했는데

정말로 그냥 살게 될줄은 몰랐다

자기삶에 적어도 자신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해줘야하는건데

지금나는 무대에 오르지도 못했다.

글쎄, 왜 갑자기 그냥 살게 되버린걸까.

이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울고싶다.

예전에는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게

참 좋았는데

요즘에는 생각을 글로 정리한다는게 불가능할뿐더러

하다보면 점점 내가 비참해서

내키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마저 하지 않으면

대체 내가 무슨생각을 하고 왜사는지조차

알수가 없다.

그냥 보여지는 거 보며

눈앞에 있는거 하며 살고있다.

마치 메모리카드 없는 디카처럼

한번 찰칵 찍고나서

다음 상을 비출땐 이미 찍었던 사진은 흔적조차 없는 것처럼.

현재에 사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사는 사람처럼

그렇게 회색갱지처럼 살고있다.

회사다니기 힘들지 않니 라고 묻는 사장님한테

아니에요 라고 말하며 방긋웃는 내가

무섭다.

아닌지 뭔지도 모르면서

힘들지 않다고 말하는 내 모습이

내가 아닌것 같아 소름이 돋는다.


2

2007년 7월 싸이월드에 적은 글이다. 그때는 졸업하기도 전이었다. 회사 이야기가 나와서 졸업한 이후에 쓴 글인 줄 알았다. 2007년이면 대학교 3학년 때인데 그때 도대체 무슨 알바를 했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회사 다니기 힘들지 않냐고 물어봐주는 사장이 있는 회사였다는데, 도대체 어디지? 앉아서 몇 분을 돌이켜 보다 결국 미니홈피를 켜서 2007년 여름 사진을 뒤졌다. 대학교 2학년 때 인턴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는 회사였다. 대학교 3학년 때 한 것이었다. 10년 전 과거는 일 년을 착각할 정도의 거리인가 보다.


3

이 일기의 제목은 '뇌질환'이었다. 우습게도 나는 이 글을 쓴 뒤로부터 5년 뒤에 진짜로 공황장애에 걸렸다. 공황장애가 걸리기도 전에 내가 공황 상태를 언급하며 일기를 썼을 줄은 몰랐다. 이래서 뭐든 기록은 남겨놓고 봐야 하는 건가. 쓰지 않았으면 망각의 바다를 건넜을 것이다. 인사이드 아웃의 빙봉처럼 장렬하게 사라졌을 기억이 이렇게 글에 매여 남아있다.


4

저 당시보다는 훨씬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 일기를 쓰고 있다. 저 무렵을 일기들을 들춰보면 지금이랑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사람들의 직관적인 사고 때문에 힘들어 한 이야기도 있고, 솔직하지 않게 가면을 쓰고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 때문에 낙담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술에 관한 비유도 지금보다 자주 등장한다. 일 년에 서너 번은 필름이 끊기도록 술을 마시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술도 조절해서 마시게 되었고, 인생은 앞으로 더 즐거워질 거라는 믿음도 생겼다. 10년의 거리만큼 달라진 내가 10년 전의 일기를 신기하게 읽는다. 이런 걸 쓴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데 내가 쓴 것이라니 흥미롭다. 문득 10년 뒤의 내가 2017년의 백일을 기록한 글이 어떻게 읽힐지 궁금해진다. 그때도 저 때보다 지금이 훨씬 낫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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