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62
1
어린 시절 나는 오빠와 같은 방을 썼다. 방문을 열면 왼쪽에 책상이 있고 맞은편에는 이층 침대가 있었다. 이층 침대 너머에는 벽을 가득 메운 책꽂이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책꽂이를 이층 침대가 막고 있는 구조니까 무척 이상한 가구 배치였다. 하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익숙하고 편안한 구조였다. 침대에 누운 채로도 아무 책이나 꺼내서 볼 수 있었으니까.
2
오빠와 나는 둘 다 침대의 이층을 선호했다. 그래서 한 달씩 돌아가면서 이층을 썼다. 이층을 쓸 때는 낮에도 밤에도 밝았다. 주로 책꽂이의 서너 번째 칸에 꽂힌 책들을 읽었다. 일층을 쓸 때는 낮에도 밤에도 어두컴컴했다. 다만 너무 밝지 않은 점이 좋기도 했다. 침대에서 누워서 책을 들어 올리면 책과 함께 이층 침대의 나무로 된 바닥이 보였다. 당시 많이 읽었던 책 중 셜록 홈즈 시리즈는 갱지로 된 얇은 책이었다. 갱지에서는 쾨쾨한 향이 났다. 홈즈는 흐린 날씨의 런던에 살았고 주로 밤에 돌아다녔다. 갱지의 향과 아주 잘 어울리는 내용이었다. 책 너머로는 갱지보다 좀 더 어두운 색깔의 나무 바닥이 보였다. 그 둘은 아주 조화로운 색이었다. 나는 거기서 그 갈색의 조화를 즐기다 잠이 들곤 했다.
3
간혹 일층 침대를 쓰는데 높은 곳에 꽂힌 책이 보고 싶으면 오빠에게 빼 달라고 했다. 오빠는 책을 뽑아서 아래로 던졌다. 재밌는 책들은 주로 높은 곳에 꽂혀있던 기억이 난다. 밑에는 추리물 같은 것이 없었다. 대신 일층 침대를 쓰면 아침에 재빨리 화장실을 선점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우리 남매는 둘 다 아침잠이 많았는데 등교 시간은 같았다. 화장실은 먼저 씻는 사람이 임자였다. 오빠가 일어나면 침대가 삐그덕거렸다. 오빠가 사다리를 밟고 내려오기 전에 재빨리 일어나서 화장실을 선점하곤 했다. 내가 이층이 되면 그 반대이긴 했다.
4
오래간만에 영국 드라마 셜록을 다시 봤다. 첫 번째 시즌을 다시 봤는데 베이커가 221B를 보니까 마음이 설렜다. 베이커가 221B는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있던 주소다. 거기에 과학 포스팅을 올리는 홈즈와 스마트폰을 쓰는 왓슨이 살고 있는 설정은 새로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과거와 현대의 공존이라고 할까. 이 드라마에서 셜록은 시신에 상처가 어떤 식으로 생기는지 알아보기 위해 시신에게 채찍질을 한다. 소설 속에서 채찍은 셜록의 주 무기이자 휴대품이기도 했는데, 현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라서 저런 설정을 준 건가 싶다. 갱지 소설 속 셜록을 알 수록 21세기의 셜록도 친숙하다.
5
이층 침대가 있었을 때 거기에서 참 많은 책을 읽었다. 학교에서 쓰라고 하는 독서 목록에는 매일 새로운 책이 적혔다. 언제나 머리맡에는 자기 전까지 보던 책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지금은 매일 책을 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층 침대를 쓸 일도 없다. 일어나 앉으면 천장에 머리가 닿을 듯한 침대. 불 끄는 스위치가 없어도 형광등에 달린 줄을 당겨서 불을 끌 수 있었던 곳. 잠이 안 와서 뒤척이면 침대의 네 귀퉁이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나던 그 침대가 문득 그립다. 다시 거기서 갱지로 된 셜록 홈즈를 읽고 싶다. 사각사각 종이를 넘기면서 무시무시한 살인범과 셜록의 승부를 구경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