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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희 Jul 12. 2016

자두와 복숭아

교육정책관의 망언과 아버지의 분노


아버지가 오셨다. 엄마가 담그신 고구마 줄기 김치와 물김치를 가져오셨다.

내가 바쁜거 같으니 김치만 두고 가시겠다는 아버지를 붙잡았다.

자두를 씻어 내왔다.

이가 시려 자두는 됐다며, 자두를 내려 놓으시는 아버지가 말씀하신다.


" 스웨덴 갈 준비는 잘 되어 가고?"


나는 곧 스웨덴에 간다.

그래서 요새 한창 스웨덴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스웨덴은 내가 가고 싶었던 국가였다. 여행이 아니라 사회복지정책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복지국가인 스웨덴을 가고 싶었다.

박사 과정 중에도 박사 졸업 직후에도 나는 스웨덴에 가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을 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올 초에 우연하게 스웨덴 연구원에 갈 기회가 주어졌다.

인생은 참 알 수 없다.

스웨덴에 2년간 박사후 연구원으로 가게 되었을 때, 웃음이 나왔다.

인생은 참 알 수가 없구나 싶어서......


3년전 나는  삶의 큰 고비를 넘겼고,

이후 나는 내 고향에서 지방국립대학교 시간강사를 하며 사는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저 우리 딸 아이 옆에 우리 남편과 부모님 곁에 건강하게 사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며 살고 있었다.

해외에 가서 공부를 다시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치도 않았다. 나에게는 과분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웨덴에 갈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다.

두려웠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것이었는데, 기쁘기 보다는 두려웠다.

내가 가서 잘 지낼 수 있을까? 내가 다시 연구를 할 수 있을까? 내 결정으로 우리 가족을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여러 고민 끝에 나는 스웨덴에 가기로 결정을 했다.


삶이 주는 것을 이제는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삶이 내게 주는 것을 이제는 좋은 것 혹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하지 않으려 한다. 아니 그렇게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조금... 깨달았기 때문이다.

3년전 28시간의 수술을 거치고 나서 나는 그 시간이 나에게 힘들었지만 동시에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았다.

그저 내 삶이 나에게 내어 주는 것을 받아들이고 믿기로 했다.


물론 결정한 것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많이 다르다.

우선 스웨덴을 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스웨덴에서 집을 구하기도 만만치 않다.

가진 돈과 써야하는 돈 사이에서 고민을 하면서 괜히 스웨덴에 가서 가족까지 고생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이런 생각에 짜증이 날때 쯤, 아빠가 김치를 들고 오신거다.


잘 익은 자두가 탐스러워 보이셨은지 한번 베어 물어보시고 이내 인상을 찌푸리시며 아버지가 다시 묻는다.

" 스웨덴 준비는 잘 되어가고?"


하지만 아버지에게 준비가 전혀 되고 있지 않으며 힘들다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 잘 되어가요."

" 그래. 스웨덴은 복지국가라서 그렇게 살기 좋은 나라라면서?"

" 그렇다나봐요"


스웨덴 집 구하기에 지칠대로 지친 나는 스웨덴이 정말 복지국가 맞는지 의구심이 샘 솟는 터라 대답도 심드렁하게 했다.


" 그러면 너랑 도연이, 우리 나라에 오지 말고 거기서 살아라"

"예?"

" 거기서 살 수 있으면 눌러 앉으라고."

" 무슨 소리에요. 2년 뒤에 와야죠."

" 왜 돌아오려고 하는데?"


집 값이 너무 비싸서도 살 수 없다는 말은 참아두고,

" 난 여기가 좋아요. 가족들도 있고...."

" 엄마 아빠 때문에 그래? 우리 걱정은 하지 말아라, 니 엄마랑 나는 잘 살거다. "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 난 개 돼지다."


아....교육부 정책 기획관 망언 이야기를 하시려나 보구나 생각 했다.

평상시 뉴스를 즐겨 보시는 우리 아버지.


" 그 미친 공무원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 사람 미친거야.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해. "


자두를 하나 더 먹어야 되나 고민을 하면서, 별 생각 없이 물었다.


" 그렇다고 왜 아빠가 개 돼지야. 그 사람이 미친거지...."


" 난 그렇게 살았어. 개 돼지 마냥 시키는 대로 일하고, 당장 먹고 살 것만 걱정하고 그렇게 살았다. 전쟁 끝난 후에 태어나 가진것도 없고,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자라서 니 엄마 만나 결혼하고 너희들 낳으니 너무 무섭더라. 너희를 먹여 살려야 하니까 . 그래서 정말 개, 돼지, 소 마냥 일했다. 중동도 5년 넘게 다녀오고, 공사장에서 죽어라 일하고......그렇게 살면, 난 개, 돼지 처럼 살면 너희는 사람답게 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너희도 개, 돼지라니.....내 새끼들한테 개 , 돼지라고 하다니....너무 화가 난다."


"너는 화도 안나냐?"


갑작스런 아버지의 분노에 나는 당황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질문에 대답 대신 아버지가 한 입 베어 문 자두만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나도 화가 났다. 참 잘 돌아가는 세상이라고 냉소도 하고, 어쩌면 다른 고위 공무원들도 이처럼 생각하고 있을거라고 비아냥도 거렸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지금 내 앞에서 쏟아내는 분노에 비하면 나의 것은 아주 가볍고, 냉소적인 것이었다.


왜 아버지가 나에게 스웨덴에 가면 돌아오지 말라고 하셨는지 이해가 되었다.


" 그 나라는 국민을 존중하고, 사람을 아낄 줄 안다며? 네가 예전에 그랬잖냐. 복지국가는 사람을 아끼는 국가라고...그러니 너희는 거기 가면 거기서 눌러 앉아. 존중받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시는 아버지를 배웅하며, 아버지가 그토록 화내시는 것에 가슴이 아파왔다. 그리고 한편으로 아버지와 다르게 이번 사건을 냉소와 비아냥으로 일관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는 왜 분노하지 않았는가?


사는게 바빠서? 혹은 이 나라에 기대를 하지 않아서?


어쩌면 나도 30년 후 쯤 우리 아이에게 이렇게 이야기 할지 모른다.

" 난 개 돼지다. 개 돼지 마냥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고 살며, 너희만은 사람답게 살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너희도 개 돼지 라니.....이 국가가 변하지 않다니....여전히 너희들은 1%를 위해 죽어라 일하면서 존중도 못받고 살아야 하다니...."


사회정책을 공부했다면서, 그래서 복지국가인 스웨덴에 사회정책을 공부하러 가고자 하면서....

정작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던 것인가?


삶은 다시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아버지가 가신 후, 이가 시려 끝내 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자두를 치우면서,

마트가서 아버지가 좋아하는 부드러운 복숭아 사다 드려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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