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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희 Oct 02. 2017

놀기에 나쁜 날씨는 없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뛰어 놀 권리가 있다.

작년에 여기 오면서,  우리 가족에게 가장 큰 문제는 스톡홀름에 집을 구하는 것과 딸 아이 학교 진학 문제였다.

평생 스웨덴어는 들어 본 적이 없으며, 영어도 못하는 아이가 과연 여기 학교에 어떻게 적응을 할 수 있을지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우여 곡절, 아이의 학교가 정해졌고 드디어 아이가 입학하는 첫 날이었다.

그날 아침, 남편이 아이에게 수첩을 내밀었다. 

아주 작은 단어장 정도의 수첩이었는데, 거기에는 " I' m Sorry.", "Can you speak again?", " I don't Know." 등의 아주 짧은 문장들이 써 있었다. 물론 반대편에는 한글이 써 있었다. 

스웨덴어는 커녕 영어도 전혀 모르는 우리 아이가 혹시 학교에서 힘들까봐 남편이 생각해낸 방법 중 하나였다. 

나중에 우리 아이가 대화 카드 중 본인이 가장 많이 쓴 것은 " 죄송하지만, 이해가 안되요." 였단다. 

이렇게 '이해가 안되요' 라는 카드만 계속 내밀어 보일 수 밖에 없었던 우리 딸은 입학 초창기 항상 학교 운동장 구석에서 땅을 파고 있었다.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가면, 우리 딸아이는 매번 그 큰 운동장 구석에 혼자 혹은 본인보다 아주 어린 동생들(거의 유치원생으로 보이는)과 땅을 열심히 파고 있었다. 또래랑 놀고 싶어도 말이 잘 안통하니 놀 수 없었나 보다. 

그래도 힘들다는 투정도 안하고 학교를 잘 다니는 딸 아이가 대견하고 고마웠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말도 안통하고, 힘들만도 한 학교를 우리 딸은 잘 다니는 거다. 

(학교 적응이라는 것에 대해 물론 아이들마다 성향도 다르고, 우리 아이의 사례를 일반화 할 수 없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겠다.) 아이의 성격이 워낙 낙천적이라서 그런가 싶기도 했지만, 궁금하기도 했다. 


그날도 우리 딸은 아빠가 적어준 카드를 주머니에 있는지 확인한 후 집을 나섰다.

카드 옆구리가 너덜너덜 해진 것을 보니, 학교에서 저 카드를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수 없이 보여주고 다녔을 딸 아이 모습이 눈 앞에 선하다. 

나도 힘들지만, 우리 아이도 온 몸으로 힘듦을 견디고 있구나란 생각에 괜시리 코 끝이 시큰하다.

그날도 아침에 학교를 간다고, 신나서 가방을 메고, 콧 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서 가는 아이에게 한마디 건낸다.


" 도연아, 너는 (말도 안통하는데)학교 가는 것이 좋아?" 

" 예 ? 그게 무슨 말이에요?"

" 여기 학교가 좋냐고? 지금 다니는 학교 말이야? 엄마는 도연이가 힘들거 같은데, 단 한번도 학교 안가겠다는 말도 없이 잘 다녀서 ...."


지하철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딸이 다리를 흔들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다.,


" 말이 안 통하니까 너무 답답하긴 해요. 무엇보다 점심 시간에 더 먹고 싶은데..그 말을 할 수 가 없어요.(더 먹고 싶다는 말은 카드에 없었다.) 친구들이랑 놀 때도 답답하고.... 특히 우리반에 싸이라는 남자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는 저를 무시하는거 같아요.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다 저에게 친절해요. 친구들이 착한거 같아요. 제가 못알아 듣는걸 아니까 천천히 다시 설명해주고...그것도 몇번이나 계속이요.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저스티나(담임선생님 성함)가 너무 좋아요. 매번 저를 보시면, 잘한다고 항상 칭찬해 주세요. 웨슬리(학습 보조 선생님)도 너무 좋구요. 그리고 무엇보다 학교가 재미있어요."


한번 말을 시작 하면, 끝이 없고 점점 목소리가 커지는 우리 딸....

지하철 안에서 너무 크게 이야기를 하는거 같아, 나는 소리를 줄여서 묻는다.


" 학교가 재미있어?"


" 예!! 진짜, 너무 재미있어요. 점심도 맛있고, 체육시간도 좋고, 야외 활동 시간에 나무를 타는데....." 아이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학교가 재미있다니...

말도 안통하는 우리 딸이 학교를 재미있어 한다. 


딸이 어렸을 때, '말 안하고 3분 있기 혹은 5분 있기'는 수다쟁이 우리 딸을 혼낼 때 주었던 벌이었다. 말 못하게 하는 것이 벌인 정도로 말이 많았던 우리 딸이, 묵언 수행을 강제로 하고 있는 그 학교를 재미있다고 말한다. 

하고 싶은 말은 언제든 할 수 있었던, 말이 통하는 한국 학교를 다닐 때도 우리 딸에게 잘 듣지 못했던 말...


'학교가 재미있다.'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스톡홀름에 있는 공립학교이다. 

4학년 1학기까지 마치고 스웨덴에 온 우리 딸은 여기 5학년에 들어갔다(스웨덴은 한국보다 학년이 빠르다고 보면 된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Preschool과정부터 10학년 그리고 고등학교까지 있는 학교이다. 우리로 치자면, 유치원 과정부터 초등 중등 그리고 고등과정까지 있는 상당히 큰 학교이다. 

하지만 학교는 크지만 매 학년이 두 반씩 있으며, 한 반당 보통 24~26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다. 그리고 반에는 담임 선생님과 보조 선생님이 계시다. 

우리 아이의 경우 스웨덴어가 전혀 안되고, 영어로도 의사소통이 전혀 안되었기 때문에, 별도의 선생님 한분이 아이 옆에서 같이 수업을 듣고 설명 해주시고, 학교 생활을 도와주셨다. 그리고 정규 수업 시간외에도 아이가 언어적인 부분에서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에 별도로 보충 수업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은 비단 우리 아이가 외국 아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혜택이 아니다. 어떤 아이든 수업을 이해하거나 다른 학생들에 비해 뒤쳐진다고 여겨지면, 이렇게 따로 한 명의 선생님이 지도를 해주신다. 그리고 이 과정은 아이가 충분히 수업을 따라 갈 수 있다고 판단이 되는 시기까지 지속된다. 

이러한 세심한 배려 덕분인지 우리 아이이는 별 무리 없이 수업을 따라 갈 수 있었다. 


우리 아이이 처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경우, 이러한 교육제도의 세심한 배려는 아이의 학교 적응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 무엇보다 학생 혼자서 수업을 가야한다는 부담감도 덜하고, 선생님들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지기 때문에 우리는 딸 아이를 말이 안통한는 학교에 보내도 어느 정도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이 점은 아이 역시 인정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스웨덴 아이들이 부러웠던 것은 그리고 우리 아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참 좋았던 순간은,

아이에게 이렇게 선생님의 세심한 배려가 있어서도 아니요,

우리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스테이크가 학교 급식에서 나와서도 아니며

(학교 급식에 스테이크가 나왔다고 흥분하던 우리 딸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 아이가 더 이상 영어 카드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될 만큼 영어가 늘어서도 아니다.


바로 넓은 운동장에서 우리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 다닐 때였다. 

전 학년의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고 웃으면서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이 나라가 부러웠다. 


진심으로 이 나라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스웨덴은 유치원에 다니는 아주 어린 아이들부터 초등학생까지 체육시간 외 혹은 점심 먹고 자유시간 말고도 하루에 일정시간은 무조건 야외 활동을 해야 한다. 이것은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바람이 불든 날씨가 어떻든 상관이 없다. 비나 눈이 오면 비옷을 입고 나가서 놀면 된다. 바람이 불면 그래도 비옷을 입고 나가서 놀면 된다. 아무리 추워도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이건 큰 아이들이건 옷만 든든히 입고 나가서 놀면 그만이다. 

학교에서도 항상 학보모들에게 비옷과 같은 물에 젖어도 상관 없는 바지 혹은 여벌의 옷을 요구한다. 


" 놀기에 나쁜 날씨는 없다. 단, 놀기 불편한 옷만 있을 뿐이다."

 

도연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서, 학교에서 받은 안내문이다. 아이 준비물에 대한 안내문인데, 여기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가기 싫다고 하는 아이들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경우 몸이 아픈 경우만 제외하고는 그냥 앉아 있더라도 무조건 밖에 나가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교실 밖에서 뛰어 노는 것을 좋아한다. 


특별히 놀이터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아이들은 나무를 타거나, 나무 가지를 주워서 나르거나(데체 그걸 왜 나르는지 모르겠으나, 한 아이가 나르면 다른 아이들도 나른다), 어제 파다 만 땅을 다시 파거나(혹은 판 당에 다시 흙을 퍼나르거나),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술래잡기를 하거나, 서커스를 배우는지 덤블링을 계속하면서 노는 아이(실제로 서커스를 배우기도 한다), 축구나 농구를 하는 아이들, 단짝인지 어깨를 맞대고 무슨 이야기가 재미있는지 웃으며 이야기하는 아이들.... 아이들 노는 모습을 비켜 보고 있으며, 정말 다양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이 시간을 아이들이 즐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선생님들도 아이들과 함께 밖에 나와 계신다. 하지만 근처에서 아이들을 지켜만 보시는 것이 전부이고, 아이들이 싸우거나 위험한 행동만 하지 않으면, 어떠한 관여도 하지 않으신다. 선생님과 같이 야외 활동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야외활동 시간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즐긴다.




스웨덴 아이들 노는 것을 보고 있자니, 예전에 봤던 EBS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초등학교 고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 프로그램이었는데, 주요 내용은 놀지를 못하는 우리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학원에 치여 사는 우리 아이에게 친구들과 서로 모여서 놀 시간은 없어진지 오래다. 우리 아이들에게 노는 시간은 학원과 학원을 이동하는 시간 혹은 학원에서 쉬는 시간 정도이다. 물론 이러한 시간에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휴대폰 게임에 열중하고 있다. EBS 프로그램은 이러한 초등학교 몇 명 아이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마음대로 놀아보라고 요구를 한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행동을 지켜본다. 일종의 관찰 카메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이들에게 자유롭게 놀아보라고 시간과 장소를 마련해 줘도, 우리 아이들이 놀지 못하는 것이다. 놀기는 커녕, 서로 의견이 분분해서 결국에는 싸우거나, 그냥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비단 TV 속 아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우리 아이와 그 친구들도 어쩌다 시간을 맞춰서 집에 불러 놀게하면, 친구들과 논다고 그렇게 기대하던 아이들이 막상 만나면, 한다는 말이 고작 " 우리 뭐하고 놀까?" 였다. 

그래서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놀 수 있는 놀거리를 제공해줘야 했다. 


그런데 여기 애들은 그냥 잘 논다. 

뭐 특별히 장난감이 있다거나 놀이터 시설이 좋다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잘 논다. 

이렇게 잘 노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왜 우리 아이들은 잘 놀지 못할까라는 생각이 든다.


학교든 학원이든 책상 앞 의자에서 엉덩이 뗄 시간이 없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쩌면, 놀이는, 친구와 마음껏 노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아이라면 응당 자연스럽게 뛰어 놀아야 하고, 친구들과 뒤엉켜서 신나게 떠들며 놀아야 하는데, 그리고 이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일 텐데, 현재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친구들과 놀고, 마음것 뛰어 놀고 있을까? 우리 아이들이 본래 갖고 있던 아이다움을 빼앗긴채 그렇게 자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스웨덴의 교육 제도는 우리와 다른 점도 있고, 비슷한 점도 있다. 그리고 우리 보다 좋은 점도 나쁜점도 있다. 는 스웨덴 교육의 가장 큰 장점을 꼽으라면, 나는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 놀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을 아이들의 권리로 지켜주는 교육의 가치를 가장 큰 장점으로 꼽고 싶다. 


아이들이 야외에서 신체 활동을 하는 것이 그들의 권리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지켜주는 것이 이들이 가진 교육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 가면, 책상에 혹은 교실에 갇혀 있어야 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교육제도는 바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권리가 아닐까?


숨이 찰 정도로 뛰어다니며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아이들이 이렇게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게 지켜 주는 것이 어른들이 몫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한다고, 창의력 교육을 한다고, 혹은 새로운 디지털 기술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코딩 교육을 도입을 예고하는 있는 한국의 교육 현장, 매년 새로은 교육과정 도입에 열을 올리는 교육 당국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리도 마음도 혼란스럽다.


현재 우리의 교육 정책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 아이들이 대비해야 할 미래가 4차 산업혁명 시대일 수 있고, 디지털 혁명의 시대일 수 있다. 


하지만 교육의 근간과 가치는 변화하는 미래가 아니라, 변화되는 세상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바르고 건강하게 살아 갈 수 있는 인격체를 키우는 것이다. 건강하고, 바른 가치관을 갖은 시민으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무 교육이 필요하고, 교육의 권리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교육을, 진정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직업인으로써 무엇이 되기 이전에, 우리는 건강하고 바른 사회 구성원을 의무교육을 통해 키워야 한다. 


교실 없는 학교, 교과서가 없는 교실 등 스웨덴의 교육 시스템에 많은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진정으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물론 이러한 시스템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스웨덴 교육제도가 갖고 있는 가치이다. 아이들을 건강하고 올바른 시민으로 키우기 위해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말이다. 

이러한 가치의 부재를 말하지 않고, 시스템 적인 것만 아무리 받아 들인들 과연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숨이 찰 정도로 거침 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들 틈에 우리 아이가 있다. 

이제는 제법 높은 나무도 잘 올라 타고, 아무리 뛰어도 숨을 헐떡이지 않고, 깊은 물에 수영하는 것도 겁내지 않는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추워도, 눈이 와도 우리 아이는 여기 스웨덴 아이들 틈에서 같이 뛰어 다닐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 가야 할 세상은 아마도 비가 오는 날도, 바람이 몹시 부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화창한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그 어떤 날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올바르고 건강한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진정으로 대비 하여야 하는 것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과 기술의 변화가 아니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은 변화하는 미래에 대응하기 위한 신 기술이 아니라, 변화되는 세상과 급변 할 것이라 예상되는 어떠한 미래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을 굳건하고 건강한 가치를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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