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종교와 문화적 차이를 수용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스웨덴에 가을이 오고 있다. 스웨덴에 가을이 온다는 의미는 흐린 날이 많고, 점점 해가 짧아 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작년에 스웨덴의 가을을 겪어 본 나는, 오늘처럼 햇볕이 화장한 날은 무조건 가방을 꾸려서 외출을 한다.
라떼가 맛있는 한적한 동네 카페도 좋고, 도토리 나무가 무성한 우리 동네 공원도 좋다. 어디든 햇볕만 있는 곳이면, 행복하다. 바람은 쌀쌀 하지만, 햇볕이 참 좋다. 하늘도 유난히 푸르고 높다.
마침 자리를 잡은 곳이 분수대 옆이라서 그런지 바람을 타고 분수대 물이 사정 없이 날라온다. 자리를 옮겨야 겠다라고 생각을 하는 순간 분수대 맞은 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항상 피카 시간쯤 되면, 강아지 산책을 위해 동네 공원에 나오시는, 나의 친구 바박 아저씨다.
아저씨 옆에는 땅 파기가 취미인 아저씨의 강아지가 따라 온다. 몇 번이나 강아지 이름을 알려 주셨는데, 발음이 어려워서인지 아니면 원래 이름을 잘 못외우는 나의 머리 탓인지....생각이 날듯 안날듯, 답답하게 입 안에서만 강아지의 이름이 맴돌 뿐 도무지 저 갈색 털 복숭이 강아지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벌써 어디에서 땅을 파다 왔는지 주둥이 주변에는 흙이 잔뜩 묻어있다.
제발 아저씨의 강아지가 나에게 친한 척 하지 않기 바라며, 나는 되도록이면, 강아지의 눈을 피한다.
나를 만난 바박 아저씨는 다짜고짜 오늘 아침 뉴스를 봤냐고 이야기를 하신다.
나의 친구, 바박 아저씨는 이란에서 온 이민자이다. 스무살이 되던 해 아저씨는 이란의 전쟁을 피해 이 나라로 왔다. 어린 여동생과 단 둘이 스웨덴에 온 아저씨는 여기서 대학을 마치고,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베이징으로 가서 대학원을 마치고 오셨다. 당시 아저씨의 관심 영역은 한국, 일본, 중국의 외교의 역사였다. 그리고 베이징에서 대학원을 다니면서 현재의 아내를 만나셨다. 지금 아저씨는 두 딸의 아버지이고, 퇴직을 하셨으며, 귀여운 강아지 한마리와 매일 동네 산책을 다니시면서, 나처럼 스웨덴 생활에 적응 못하고 어설픈 실수만 하고 다니는 스웨덴 생활 초보들에게 꿀 팁을 전수해주고 계시는 아주 고마원 분이다.
아무튼 바박 아저씨를 저렇게 흥분하게 하는 뉴스는 바로, 스웨덴에 있는 무슬림 학교에 대한 것이 였다.
스웨덴에 무슬림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이들이 무슬림 사립 학교를 세웠는데, 문제는 이 학교에서 진행되는 교육 프로그램이 스웨덴의 교육적 가치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바로 성평등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슬람 학교는 철저하게 남녀를 분리해서 가르치고 있으며, 심지어 그들의 교육 내용에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며, 여성의 순종을 강조하는 교육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스웨덴 교육부는 이러한 남녀 차별적인 교육을 시키는 무슬림학교를 지원할 수 없으며, 강하게 제제를 가할 것을 예고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부의 지침에 이슬람 사립 학교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 것이었다.
바박 아저씨는 이러한 무슬림 사립 학교들을 강하게 비판하고 계셨다.
아저씨는 스웨덴 교육 그리고 이 나라의 가치를 훼손 시키는 일부 이슬람 사람들의 교육 태도를 절대 용납해서는 안되며, 무엇보다 성 불평등적인 교육을 시키고 있는 이러한 학교에 스웨덴 세금을 절대 쓸 수 없다고 화를 내고 계셨다.
한 손에는 강아지 목줄을 잡고 있고(아저씨의 강아지는 빨리 산책을 가고 싶은지 열심히 개줄을 끌어 당기고 있었다 ), 한 손에는 그 뉴스가 실린 거 같은 신문을 거칠에 흔들고 계셨다. 나는 아저씨가 가져온 신문에 실린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 보고 있었다. 이슬람 학교 담장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인터뷰를 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아저씨 말로는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의 자유와 교육의 권리를 스웨덴 정부가 침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종교의 자유 그리고 교육의 권리.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와 이념들이다.
특히 종교의 자유는 더욱더 판단이 어려운 부분이다.
무엇보다 이처럼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곳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아이 학교에서도 종교적인 이유로 돼지고기나 붉은 색 고기를 못 먹는 일부 학생을 위해 따로 급식을 마련하고 있다.
종교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은 한 사람의 인생과 그 삶을 설명하는데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종교적인 차이와 문화적인 차이는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배운다.
하지만 우리는 종교 혹은 문화적인 차이로 인한 전쟁과 충돌을 많이 겪어 왔고 목격하고 있다.
우리는 종교와 문화적인 다양성과 특수성을 과연 어느 정도 수용하고 존중해야 하는가?
만약 전혀 다른 종교와 문화를 규제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떠한 기준으로 이러한 것들을 규제할 수 있다는 것인가?
개인 혹은 집단이 세상을 이해할 때, 혹은 서로 대립하는 문제에 직면했을때 판단을 내리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개인 혹은 집단이 어떠한 일련의 사건을 바라 볼때,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찬반의 의견이 나뉘어 지는 것은 개인과 집단이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기인한다.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프랑스 철학자 트라시(A.L.C. Tracy)가 자신의 저서에서 '관념의 기원을 결정하는 과학'이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하면서 널리 사용되어지 시작했다. 이데올로기는 희랍어인 이데아(idea)와 로기(logie)가 합쳐진 형태로, 이데아는 관념과 생각을 의미하고 로기는 논리를 뜻한다. 즉,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개인의 태도, 사회에서의 개인의 행위를 설명할 수 있는 사상과 신념의 일관된 패턴이며, 그와 같은 사상과 신념에 상응한 행통패턴을 지지 혹은 주장하는 것(Karl Lo'wenstrein, 1953)을 말한다. 즉, 이데올로기는 개인 혹은 집단이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이념적인 논리 구조인 셈이다. 개인 혹은 집단이 어떠한 정책과 제도를 바라볼 때 혹은 어떠한 사건을 바라볼 때, 그리고 그 제도와 정책에 대해 찬반의 의견이 나오는 것은 바로 개인과 집단이 가진 이데올로기에 기인한다. 그들이 갖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는 이념적 논리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가장 단순하게 도식화하여 말하는 것이 바로 '좌'파와 '우'파이다. 우리도 알고 있듯, 좌파와 우파의 세상을 보는 논리 구조는 상당히 대비되고 대립된다(물론 지금 여기에서 좌와 우에 대한 논의는 하지 않을 것이다 . 오늘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좌와 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인들은 혹은 집단은 어떻게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선택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개인이 가진 가치에 따라서이다.
가치(價値, value) .
그리고 이러한 개인의 가치는 다시 본인의 종교적, 문화적, 국가적 배경과 같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살아가면서, 다양하고 첨예한 각을 세우는 문제에 직면하였을때 사람들은 본인들의 중요하게 여기는 그것,
바로 가치에 의해 문제를 바라보고 결정을 하게된다.
어쩌면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들의 대립은 이러한 가치들의 대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바박 아저씨가 말하는 무슬림 학교에 대한 스웨덴 정부의 제재 역시 서로 다른 가치의 대립이라 할 수 있다. 남녀의 분리가 엄격한 종교적인 교리를 지키는 것이 그들의 종교의 자유이며, 이것에 대한 교육을 제재하는 것은 교육의 권리를 위배하는 것이라 주장하는 그들의 가치와 이러한 교육 형태가 스웨덴이 지켜오고 있는 평등 특히 남녀간의 평등에 대한 가치를 위배 했다고 보는 측 모두, 본인들의 가치에 대한 지지와 주장인 셈이다.
스웨덴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산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란, 이라크, 시리아, 인도, 중국, 일본, 한국, 태국 그리고 이름도 생소한 유럽의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산다. 당연히 생김새도 다르고, 그들이 가진 문화와 종교도 다양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양한 문화와 종교적 가치를 스웨덴은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까?
종교적 다양성, 문화적 다양성 그리고 이러한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이 나라는 교육을 통해 강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존중과 포용의 조건은 바로 이들이 정의롭다고 판단되는 가치에 의해서만 허용이 된다.
스웨덴은 교육 뿐 아니라 노동 시장 그리고 사회전반에 걸쳐, 평등이라는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평등은 계급적 평등 뿐 아니라 남녀평등 역시 이에 해당된다.
스웨덴은 젠더 평등 지수가 높은 국가들 중 하나이며, 모든 인격체에 대한 존중과 평등의 가치는 스웨덴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이며, 국가 운영의 기조이다. 지금도 스웨덴은 젠더 평등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 정책적으로 제도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무슬림 사립 학교가 종교의 자유를 명목으로 남녀 아이들을 분리하고 차별하여 교육 시키는 것은, 이슬람 국가가 아닌 여기 스웨덴에서는 전혀 용납이 될 수 없는 부분이다. 국가를 이루고, 이 국가를 유지하는 대다수의 시민들이 지지하는 가치인 '젠더 평등'의 가치에 위배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치의 훼손이다.
스웨덴은 현재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성은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다양성은 혼란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가 갖고 있는 중요한 가치가 훼손 된다면, 다양성은 혼란을 야기 할 것이다.
그렇다고 나와 다른 종교의 규제와 문화의 규제를 의미하는 말은 절대 아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존중받고,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수용하고, 그 사회를 건전하게 지지 할 수 있는 가치가 있어야 하며, 그것에 대한 합리적인 지지가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 역시 다양한 국적과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아직 스웨덴 만큼 이민자 수가 많지는 않지만, 우리 역시 많은 이민자를 우리의 필요에 의해 받아야 할 수 있다.
분명히 그들은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들어 올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사회에 크고 작은 충돌을 유발할 것이다. 이러한 충돌과 차이에 대해 두려워하라는 말은 아니다. 어쩌면 근거 없는 두려움이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다양성이 건전하게 그리고 건강하게 우리 사회에 수용되기 위해서는 이민자들에 대한 정책적 지원과 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다양성의 충돌오 인한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가치가 필요하다. 단지 나와 달라서 반대하고 적대시 하는 것은, 차별과 오해 그리고 증오를 낳을 수 있다.
다양성의 수용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 바탕에는 인권에 대한 존중과 타인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양성의 수용 과정에서 겪는 오해와 충돌에 대한 끈기 있는 설득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안다. 그리고 이 역시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어렵다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스웨덴은 본인들이 추구하는 '평등'과 '연대'라는 가치를 고수하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을 존중하며, 그들에게 본인들의 가치를 이해시키고,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바로 설득을 통해서 말이다.
우리 사회는 과연 어떠한 가치를 고수하고 있는가? 어떠한 가치를 갖고 다양성으로 인한 차이와 충돌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이슬람 국가에서 태어나 20년 넘게 살다가 이제는 스웨덴에서 35년 넘게 살아 온 바박 아저씨는 스웨덴의 젠더 평등은 중요하고 고수해야 되는 것으로 강하게 믿고 있었다. 그가 살아 보니 그게 맞는 것이었고, 그게 정당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을 타고 도토리들이 우두둑 떨어진다. 떨어진 도토리를 주우러 아이들이 뛰어간다.
스톡홀름의 가을이 깊어져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