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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희 Mar 04. 2019

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들

나무는 타는 것이 아니다.

외할머니가 그러셨다. 물론 지금은 이렇게 굼뜬 몸이 되어버렸지만, 나도 한 때는 날쌘돌이였다. 잘 달리고, 나무 타기도 좋아했다. 나무를 타고 놀고 있으며, 저 멀리서부터 외할머니께서는 내 이름을 부르며 허겁지겁 달려오시곤 했다. 어서 내려오라고, 절대 나무를 타서는 안된다고. 나무 타다 떨어지면 큰일 난다고.

저 윗동네 누구네 아들이 감 딴다고 나무 타다 떨어져 바보 되었고, 아랫동네 누구는 술 취해 나무에 올라가 떨어져 죽었다고 할머니는 나무 타다 떨어지면 큰일 난다고 겁을 주시곤 했다. 유독 우리 동네에 나무를 타다 다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인지, 나무든 담벼락이든 올라타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겁을 주시려고 할머니가 지어내신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 학교를 들어가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무 타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아무튼, 나무는 올라타면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딸은 열심히 나무를 타고 있다.  우리 동네 근처에는 큰 숲이 있다.  딸아이를 데리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산책을 다니는데, 꼭 이 나무만 보면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딸아이는 나무에 오르고 만다. 그리고 우리 도연이 곁에는 도연이보다 한참은 어려 보이는 꼬맹이들 서너 명도 같은 나무를 올라타고 있다. 이쯤 되면 나무가 몸살을 하겠다 싶다.


처음에 나는 나무에 오르는 딸아이를 안절부절못하며 아래서에 지켜보고 있었다.

" 그만 내려와, 더 올라가지 마" 이러면서 아이에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가 나무를 타면, 나무 아래에 편히 앉아서 기다린다. 한번 나무를 탄 아이는 금방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무 밑에는 나처럼 아이를 기다리는 엄마 아빠들이 있다.

스웨덴 나무들은 크고 두껍다. 가지도 많고, 구불구불 자라는 것들도 많아서 아이들 놀이터로 딱이다.


나무를 좋아하는 딸은 아예 책을 갖고 올라가서 책을 읽기도 한다.

정말 아이가 딱 등 대고 책 보기 좋게 자란 나무들이 있다. 신기할 정도이다.

물론 내가 올라가서 앉으면 엉덩이가 아프다. 딱 아이들 맞춤 의자인 셈이다.


우리 딸이 처음부터 나무를 잘 탄 것은 아니다. 아예 나무를 탈지는 몰랐다. 겁도 많았고, 도시에서 살던 우리 딸아이가 나무를 탈 기회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여기 와서 친구들과 놀다 보니 나무를 타게 된 것이다.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는데, 달리기를 워낙 잘하는 딸아이가 술래가 되면 모든 아이들이 속절없이 잡히는데, 아이들이 나무로 도망치면, 나무를 못 타는 딸아이는 그저 나무 아래서 올려다보면 속만 태우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제는 나무까지 잘 타니, 딸아이가 술래가 되면, 다른 아이들 작게 틴식을 한다. " 아 , 우린 다 죽었어 이제!"


우리 딸이 여기 와서 나무 타기만 배운 것은 아니다.

수영도 잘한다. 이 나라에서 수영 수업은 아주 중요한 수업이다.

처음 우리 딸이 여기 왔을 때, 수영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수영을 배우는 환경이 우리와 너무 달랐기 때문에 나도 아이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물에 뜨지도 못하는 아이가 수심 2미터 넘는 수영장을 보더니 절대 들어가지 겠다고 버티기 일쑤였다. 구명조끼라도 입혀서 들여보내면 안 되냐고 묻는 나를 쳐다보던 선생님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본인의 귀를 의심한 듯 보였다. 선생님의 반응에 나는 준비해 간 구명조끼를 꺼내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딸은 250미터 수영장을 한 번도 쉬지 않고 왕복 8번 수영한다. 물속에서 아이들은 더 자유로와 보인다. 아이들이 다이빙하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도 시원해진다.


여기로 오기로 결정을 했을 때, 주변 반응은 축하와 우려 반반이었다.

우려를 해주시는 분들은 대부분 아이 때문이었다. 외국에 나가 본 아이들이 나중에 한국에 와야 할 때 오지 않겠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주변분 중 한 분은 본인 지인 경험을 이야기하며, 아이 아빠가 해외로 발령이 나서 외국에 가족이 나갔다 3년 뒤에 들어왔는데, 아들이 절대 안 들온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들이 들어오니 억지로 데리고 왔는데, 결국에는 한국 학교를 적응하지 못해서 엄마와 아들만 다시 나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 저학년이 아니고 고학년 아이를 데리고 나갈 때는 고민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었다.


솔직히 나는 그전까지 내 일에만 집중하느라 아이를 데리고 났을 때 우리 아이가 어떤 경험을 하고 우리 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그러한 걱정을 크게 하고 있지 않다. 아이는 잘 적응하고 있었고, 엄마 일이 끝나면, 한국에 가서 살아야 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한국 아이들이 다 우리 딸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한국으로 다시 되돌아 가기를 싫어한다. 주재원으로 나와 이제는 되돌아 가야 하는 분들이 본인 아이들이 한국에 되돌아 가는 것을 너무 싫어한다고 걱정을 하시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아이들이 한국에 가기 싫다고 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학교 때문이다.

학교....


초등학교까지 한국에서 다니다 여기서 중학교를 다니는 아이는 본인은 절대 한국에 가고 싶지 않단다. 본인은 한국에 있을 때 초등학생이었지만 밤 11시까지 학원에 다녔다는 것이다. 다시는 그러한 곳에 가고 싶지 않다는 아이의 말에 솔직히 공감이 갔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 아이의 부모에게 왜 아이를 늦게까지 학원에 보냈냐고 마냥 비판할 수는 없다. 아이 부모도 나름 사정이 있다. 우선 맞벌이였기 때문에 아이를 돌봐줄 사람도 없었고,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다 다니는 학원에 우리 아이만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 두려웠단다. 설령 학원을 많이 보내는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지만, 학원을 보내지 않을 대안도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지금 우리 딸아이 친구들 중 대부분이 저녁 늦게까지 학원을 다닌다. 그나마 저녁 늦게라도 집에 들어오면 다행이다.대부분의 아이들은 밤인지 새벽인지 암튼 12시 집에 들어오는 요일도 있다고 한다.


학교가 싫어서, 한국에 가기 싫다고 하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무겁다.

우리 교육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교육정책 전문가는 아니다. 그래서 이번 글을 쓸 때 고민을 했다. 사회정책만 이야기해도 할 이야기가 많은데 굳이 내 전문 분야도 아닌 교육정책을 이야기해도 될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다.


하지만 비록 내가 교육정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오늘 나는 교육정책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사회정책을 공부하면서 사회정책이 올바르게 시행되고 그리고 시민들이 정책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그 시작점이 바로 교육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며, 나 역시 한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나라 교육정책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 아이들은 왜 학교에 갈까?


한참을 고민하다. 현재 학교에 다니고 있는 우리 딸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 도연아, 너는 왜 학교에 가?"

"학교에 왜 가냐고요? 엄마도 참~ 학교에는 배우러 가죠~ "

무슨 그런 질문이 있냐는 투로 아이는 쉽게 대답을 한다.


" 그래? 그럼 어떤 것을 배우러 가는데?"


딸아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한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을 배우러 가죠.


" 그렇구나, 학교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을 배우는 곳이구나!!"


나의 감탄에 딸아이는 왜 그렇게 당연하고 쉬운 사실을 엄마가 모르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을 배우는 곳, 우리 딸아이가 내린 학교의 정의이다.  


놀랍게도 딸아이가 한 말은 바로 18세기 유럽의 사상가인 루소가 그의 역작인 <에밀>에서  했던 말과 일치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다.

18세기 유럽 사회는 시장주의, 자본주의에 강력한 지배를 받고 있던 시대였고, 교육 역시 자본주의 영향 아래 시장의 주문에 따라 상품을 만들어 내듯이 시장에 적합한 인간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시장에 필요한 인간을 만들어 내는 곳..... 그곳이 바로 18세기 유럽의 학교였다.


18세기 유럽의 사상가인 루소는 당시 교육의 현실과 폐단을 절감하고 아이들을 그러한 교육 현장 속에 내몰고 있는 사회와 부모들을 비판했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현장을 비판한 책이 바로 <에밀>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루소의 <에밀>은 에밀이라는 아이의 성장 소설이라 보면 된다. 에밀이 성장하며 초등학교를 거쳐 고등 교육까지 받으며 그가 받은 교육의 현실을 통해, 당시 교육의 비인간성,  인간에 대한 존중과 소중함을 배우기보다 지나친 경쟁과 어린 나이에서부터 지식 위주의 지나친 교육 등을 통렬하게 비판한 책이라 보면 된다.


시대적 상황은 다르지만, 18세기 유럽의 학교 모습이 마치 현재 우리 학교 교육을 연상시킨다.

어린 나이에서부터 시작되는 조기교육 열풍, 사회에 만연한 학력 제일주의, 교육성과 우선주의, 지나치게 과열된 입시 경쟁, 이미 감당할 수준을 넘어 공교육을 위협하는 사교육의 성장 그리고 지옥이라 비유되는 그 속에서 어른들에 의해 과도하게 희생되는 우리의 아이들......


<사진 설명>

독일 여행 중 우연히 읽게 된 잡지에서 한국 교육을 소개하는 글을 보게 되었다.

초등학교부터 시작되는 입시 경쟁과 획일적이고 비인간적인 한국의 교육 현실을 보여주는 글이었다.

그리고 사진 속 아이들은 미세먼지 마스크를 쓰고 있다. 팍팍한 학원 일정으로 뛰어놀 시간도 턱 없이 부족한 우리 아이들이 이제는 미세먼지로 인해 마스크를 쓰고 책상에 앉아 있다.







정말 우리 아이들은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것일까?

우리 아이들은 현재 학교에서 그리고 어른들에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을까?


딸아이와 그 친구들이 학교 카페에서 옹기종기 앉아 있다.

딸아이 친구들에게 사과 주스를 돌리며, 혹시 내가 하는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지 물어본다.

아이들은 사과주스를 좋다고 마시며, 흔쾌히 좋다고 한다.


나는 우리 딸에게 한 질문을 그래도 아이들에게 했다.


"너희는 왜 학교에 오니?"

대답은 다양하다.

하지만 주로 딸아이 대답처럼 학교는 배우기 위해 온단다.


그런데 무리 중 가장 작은 아이(이 아이의 꿈은 소설가다)가 수줍게 이야기한다.


"나는 친구가 있어서 학교에 와요"


이 말에 다른 아이들이 엄지를 치켜든다. 그리고 다들 동의한다. 실은 본인들도 친구 때문에 학교를 오는 것이라 한다. 배우기 위해서도 오지만 친구가 없다면 정말 오기 싫었을 거란다.


" 솔직히, 나는 친구에게 배우는 것이 더 많은 거 같아"

환경과 소수자 인권에 관심이 많은 남자아이 말에 다른 친구들도 의견을 보탠다.

친구의 도움을 통해 배웠던 것, 친구와 이야기를 통해 본인이 몰랐던 것을 알았을 때, 심지어 친구와 싸움을 통해서도 배웠던 것이 있었다고.


예전에 나는 우리 교육의 문제는 제도의 문제라 생각했다. 그래서 공교육이 무너지고 사교육이  넘게 몸집을 불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우리 교육의 문제가 잘못된 제도에서 오는 것인가?

제도만 잘 정비되면, 현재 우리 교육의 병폐는 사라질 것인가?


정책과 제도는 도구이다. 이 말은 그것을 사용하거나 만든 주체가 있다것을 의미한다.

물론 세심하지 못한 제도와 획일적인 학교 정책의 문제도 분명하지만. 그것을 사용하거나 만든 주체의 잘못이 가장 크다.

그렇다.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교육을 둘러싼 어른들의 이기심과 욕심이다.


친구가 보고 싶어 학교에 온다는 아이들 그리고 친구를 통해 다름에 대해 이해하고 더 많은 것은 배운다는 아이들.

이것이 우리 아이들의 본연의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오로지 대량 소비, 학력 제일주의, 약자에 대한 멸시, 역사와 문화에 대한 경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지나친 경쟁만이 존재하는 미래를 제시하였다.


결국 학교에는 '친구'가 사라졌다. 대신 우리 아이들 곁에는 '경쟁자'만 남아 있다.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을 이러한 교육 현실의 희생양으로 내몰 수는 없다.


<분노하라>의 저자인 스테한 에셀은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도구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구 자체가 중요하지 않고  '무엇이 지식인지'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즉, 올바른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독단주의, 망상, 오류, 멸시는 절대 올바른 지식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올바른 지식이란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를 교육함으로써 연대와 박애를 실천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본인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타인과의 차이점을 인식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스테판 에셀은 우리 아이들이 이러한 교육을 통해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삶에서 마주할 수 있는 두려움과 불안에 맞서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 말에 진심으로 동감한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본인의 삶과 공동체를 마주 할 수 있는 기회는 바로 다양한 사고와 다양한 인성을 갖고 있는 친구들을 통해서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자신의 삶 올바른 시민으로의 타인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 만이 성공의 열쇠라고 배우는 곳은 더 이상 학교가 아니며, 그것을 교육이라 할 수 없다.


현재 한국 교육 문제의 본질은 정책의 부재와 미비가 아니라, 현재 교육이 부정의하고 폭력적인 가치만을 교육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이 '올바른 삶'을 가르치기 위한 수단으로 다시 세워져야 한다.


경쟁을 부추기기 위한 수단으로 교육,

서열을 정하고 아이들을 구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육을 우리는 단호하게 거부하여야 한다.


다양한 친구들 만나고 서로 이해하고 같이 성장할 수 있는 '가치'와 '지식'을 배울 수 있는 곳,

친구들이 보고 싶어 우리 아이들은 '학교'로 뛰어가야 한다.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서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 딸아이가 여기 와서 배운 것은 비단 나무 타기와 수영뿐이 아니다. 우리 딸아이는 자연을 통해 그리고 친구들을 통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을 배우고 있다. 몸으로 마음으로 배우고 있다.


친구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을 배우면서 우리 아이는 타인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바로 학교에서 말이다.


우리의 학교도 이래야 한다.


교육이 변하지 않으면, 정책은 변화될 수 없으며, 결국 사회는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경쟁과 폭력이 난무하는 지옥이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로 그러한 곳이 될 것이다.


교육의 목표에 대해 그리고 교육의 가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의견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믿고 싶다.


경쟁을 부추기고, 약자를 멸시하며, 휴머니즘과 연대를 잃어버린 교육이 진정한 교육이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도 이것을 원치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람의 소중하고 행복한 삶에 직결되는 보편적인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제도는

더 이상 제도가 아니며, 충돌하는 상황에서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의 삶과 그리고 인간 존중에 대한 가치와 충돌하는 교육제도는 더 이상 올바른 제도라 할 수 없다.


스테판 에셀의 말을 이 글의 마지막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부정의에 분노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참여하며 희망적인 결과에 대해 낙관하라

그리고

삶의 희망을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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