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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희 Feb 26. 2019

가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할머니, 이 신발 신고 어디 가실건데요?"


할머니는 신발을 품에 꼭 껴 안고 계셨다. 어디를 가든 신발이 어디 있는지 꼭 챙겨야 안심을 하시고,

심지어 가족과 함께 있어도 본인 신발을 꼭 챙기신다.

누가 가져가지도 않을 신발인데, 왜 할머니는 그토록 신발에 집착을 하시는지 궁금했다.


"할머니, 이 신발 신고 어디 가시려구요?"

나는 재차 물어본다.

불안한 시선의 할머니는 잠시 망설이시다, 나지막하게 말씀하신다.

"우리 엄마한테 가야해요. 우리 엄마가 나 찾을 거에요. 엄마가 나 찾기 전에 집에 가야하는데...."


여든을 훌쩍 넘기신 할머니의 어머니는 돌아가신지 오래다.

할머니는 그 긴 삶의 어디에 머물고 계신 것일까?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계셨다.


치매는 가족에게도 그리고 당사자에게도 너무 가혹하고 잔인한 병이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현재 내 자신 조차 잊어 버리는 망각의 병, 치매.

가족과 같이 있지만,  현재의 가족을 기억 할 수 없는 할머니는 어떤 기분이셨을까? 아마도 항상 모르는 사람 속에 둘러싸여 있다는 불안함과 외로움 속에서 있지는 않으셨을까?

할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에 묵직함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한 신문에서 현대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병이 치매라는 기사를 봤다. 암보다 치매를 더 무서워한다는 것이었다. 암보다 무서운 질병, 치매.

나에게 치매는 무서운 질병이다.



치매 요양원 방문을 계획하는 그 시점부터 나의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바로 치매라는 그 질병의 무게가 나에게 너무 무겁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요양원을 방문하는 날은 눈이 소복하게 내린 날이었다.


건물 앞에 조그맣게 달린 간판이 없었다면, 나는 이 노인시설과 주변의 다른 주택 건물들을 구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시설 뿐 아니라 다음에 방문한 시설들도 그랬지만, 노인시설이라고 특별하게 부각되는 외형이 아니라 일반 주택과 같이 지어져 있다는 것이 특이했다.  


요양원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참 아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내가 방문한 시간은 식사를 마치고 나른하게 휴식을 취하고 계실 때였다.

흘러간 스웨덴 가요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듯한 거실에 흐르고 있었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시는 분도 있고, 음악에 취해 손으로 리듬을 타는 분도 계셨다.

이 기관은 총 4개의 유닛으로 구분을 되는데, 한 유닛 당 8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기관에 계시는 치매 노인분들은 총 32명이 된다. 물론 어르신들은 각자 자신들의 방을 갖고 계신다.

공동 생활 공간인 식당과 로비에 앉아 노인분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문득 정말 이분들이 치매 노인분들이 맞나 생각이 들었다. 기관 담당자인 애니는 이 곳은 치매 판정을 받지 못하면 들어 올 수 없는 곳이라 설명을 해주었다. 애니의 말에 의하면, 이분들은 중증 치매 노인분들이고, 이 곳에서 여생을 마치실 때까지 계실거라 했다.


잔잔한 옛 노래와 겨울 햇살이지만 로비 구석구석 비추는 햇살 덕분에 관찰 방문의 목적을 갖고 나 조차 나른해지고 있었다. 간간히 들려오는 나지막한 이야기 소리와 웃음소리가 없다면 정말 이 공간은 편안함과 느긋함 그 자체일 것이다.


편안하고 여유로왔다.

나는 왜 이곳이 여유롭고 편안하다고 느꼈을까?

우선 나는 이 곳에 계시는 노인들의 수가 적다는 것을 느꼈다.  이 기관 전체 노인들은 서른명 남짓이지만, 한 유닛(방 8개, 공동 식당, 공동 로비, 간호사실 등으로 구성)에 생활하시는 노인들은 총 8명이다.

이 넓직한 공간한 8명의 노인들이 케어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적은 수로 기관이 운영되는 것이다. 이 기관만 특별해서 작게 운영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기관들 역시 소규모로 운영이 된다. 내가 말하는 소규모라는 것은 기관의 시설이 작다는 것이 아니라 기관에서 돌보는 노인분들이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소규모로 운영되는 이유는 스웨덴의 모든 노인시설이 지자체의 책임으로 운영이 되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노인시설의 운영과 관리 책임은 모두 지방정부(쿄뮨)에게 있다.


그리고 내가 놀란 것은 바로 이분들이 생활하시는 방이었다.

방은 구조는 동일하지만, 각자 방이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본인들의 물건으로 가득 채워진 방은 가구는 물론 방의 전등까지 본인의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말그대로 본인의 방이었다.


그리고 그 방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이들의 삶과 가족들이 간진된 사진들이었다.

비록 지금은 그 시절을 기억 하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여기에 계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치매를 앓기 전에 어떠한 분이셨는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한 할아버지 방에는 매년 본인의 빨간 집 앞에서 찍었던 사진들이 있었다. 본인의 젊었던 시절부터 결혼을 해서 아이들이 하나씩 늘어나는 순간까지 그리고 다시 부부만 남아 있는 사진까지 흑백부터 칼라사진까지 쭉 걸려있기도 했다. 아마 이 할아버지에게 그 집은 평생을 같이 한 공간이상의 특별한 의미였을테다.

그런데 그 곳을 떠나 이 곳으로 오시게 되다니...마음이 먹먹했다.

하지만 그 할아버지의 방에는 손주들이 보낸 편지와 엽서 그리고 그림들이 여기저기 걸려있었다.


그랬다.

여기는 가족들의 공간이기도 했다.

치매라는 병에 걸려 요양원에 왔지만, 이들은 그들의 추억과 가족들의 사랑을 같이 갖고 여기에 왔다.


나는 치매 요양원을 방문할때마다 기관 담당자에게 노인분들의 가족들이 자주 방문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했다. 물론 가족마다 차이는 있지만, 주로 많은 가족들이 자주 들른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출퇴근 할때 들르기도 하고 혹은 손주들이 학교 끝나고 들르기도 한단다. 그저 일상으로 찾아오는 것이 대부분이라 했다.

내가 방문한 요양기관은 그 위치가 다 그 동네의 중심가에 있었다. 지차철 역 근처 혹은 버스역 근처로 교통도 편리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내가 방문한 기관만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의 스웨덴 노인시설들이 쿄뮨에서 직접 운영하거나 혹은 위탁 경영을 하기 때문에 노인 시설은 시내에 위치해 있다. 이 말은 내가 사는 곳과 멀지 않은 곳에 부모님을 모실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 보니, 주말에 시간을 내서 혹은 휴가를 내고 찾아 가야하는 번거로움이 없다. 출근하면서 혹은 퇴근하고 엄마와 아빠를 보러 갈 수 있다. 혹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들러 보고 갈 수 있다.


가족......


치매는 본인에게도 잔인하지만 가족들에게도 잔인한 질병이다.

치매가 더 가슴 아프고 잔인하다고 느꼈던 순간은

할머니가 어머니와 외삼촌들을 알아 보지 못했던 순간이었다. 가족을 잊어 버리는 병, 치매.

하지만 치매의 비극은 가족이 잊어 버리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치매에 걸린 가족 구성원에 대한 돌봄이 너무 버겹고 힘들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가족들의 슬픈 이야기를 듣곤 한다. 치매에 걸린 남편을 죽인 부인,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자살을 한 아들 이야기....

치매는 한 가족이 부담하기에는 너무 가혹하고 버겨운 병이다.


여러분들에게 질문 하나를 하겠다.

가족 중에 누가 아프거나 돌봄이 필요할 때, 누가 돌봐야 하는가?

내 부모가 아프실때 혹은 내 아이가 아프거나 너무 어려 돌봄이 필요할 때, 누가 돌봐야 할까?

치매에 걸린 노인분들을 누가 돌봐야 하는가?


나의 대답은 "가족"이다.

나의 대답이 정부, 정책이 아니라서 당황했는가?

좀 전까지 치매 노인에 대한 돌봄의 부담으로 빚어진 가족의 비극을 이야기 해 놓고는 가족 구성원에 대한 돌봄을 가족이 해야 한다고 해서 어리둥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에 대한 "돌봄"의 책임에서 "가족"의 역할은 아무리 좋은 정책이 있다고 해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가족의 돌봄을 대체할 그 좋은 정책은 이 세상에 없다.

가족의 돌봄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는 단순하지만 강하다.

바로 돌봄이라는 행위 자체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사랑과 관심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감정의 언어이고 행위기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그냥 우는 소리로 들리는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듣고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배가 고픈지, 잠 투정인지, 몸이 아픈지 알아챈다. 치매에 걸려 설령 자식을 못알아보는 어머니라 하더라도 자식들은 우리 엄마가 혹은 우리 아빠가 좋아하시는 음식을 알고, 생활 습관을 안다. 그래서 모시고 있는 요양원에 찾아 갈때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챙겨가고,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색깔의 옷을 사들고 간다.


가족의 돌봄은 절대 정책으로 대체 할 수 없고,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가족의 돌봄 기능에는 하나의 역설이 숨어 있다.  


유럽의 연구 결과들이기는 하지만 가족 돌봄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연구 데이터가 있다.

바로 가족 돌봄에 대한 데이터인데,  가족이 만나는 횟수와 돌봄 시간에 대한 데이터이다.

우선, 노부모를 돌보는 자녀의 비율을 보면 덴마크와 스웨덴의 경우 20%에 가까운 반면,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12%에 그친다. 또 다른 데이터는 바로 조부모가 손자를 돌보는 비율이다. 유럽 역시 조부모는 아동 돌봄에 중요한 역할자이기도 한다.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조부모가 손자녀를 돌봐주는 비율은 50~60%에 육박한다. 북유럽에서 말이다. 반면,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는 40%에 그친다.


남부유럽 특히 스페인 이탈리아는 가족주의가 강한 국가들이다. 가족의 가치와 가족의 연대가 유럽 안에서 상당히 강한 국가들로 분류된다. 반면 북유럽은 개인주의가 강한 국가로 여겨진다. 부모와 동거하는 자녀의 비율이 낮고, 노부모 역시 단독으로 사는 세대가 높다.


그런데 노부모 돌봄 비율과 조부모가 손자녀를 돌봐주는 비율을 보면, 가족주의가 강한 남부유럽보다 개인주의가 강한 북유럽에서 더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결과가 뒤 바뀐게 아닌가?

어떻게 가족주의가 강한 남부유럽보다 개인주의가 강한 북유럽에서 가족의 돌봄 비율이 더 높다는 것이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돌봄에 대한 가족의 역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설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돌봄 시간과 강도 때문이다.


스웨덴과 덴마크에서 노부모를 돌보는 자녀의 주당 시간은 평균 2.6시간이다(앞에서 노인 시설에 출퇴근 시간 등을 이용해 일상적으로 들른다는 이야기를 상기하기 바란다). 반면 남부유럽인 이탈리아의 경우 노 28.8시간, 스페인의 경우 16시간이었다.


조부모가 손자녀를 돌보는 시간 역시 덴마크와 스웨덴의 경우 주당 7시간 내외인 것에 반해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경우 주당 27시간이다.


즉, 북유럽 국가들의 경우 가족 구성원의 돌봄의 횟수는 많지만 돌봄의 시간(강도)는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남부유럽의 경우 돌봄의 횟수는 적지만 한번 돌봄을 하는 경우 거의 오랫동안 아주 힘들게 돌봄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남부유럽에서 돌봄은 개인이 감당하기에 버겨운 것이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노무모를 돌보는 것이든 손자녀를 돌보는 것이든 아예 안하려 든다는 것이다. 속된 말로 한번 손을 대면 절때 빠져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데이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바로 돌봄의 부담이 높을 수록 가족구성원간 만남의 횟수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즉 만남의 비율과 돌봄 시간의 역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돌봄에 대한 가족의 책임이 적을 수록 가족은 서로 더 돌본다는 연구 결과는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크다.


바로 정책이 해야 하는 역할을 정확하게 짚어 주기 때문이다.

정책은 가족들이 가족 구성원을 돌보는데 버겹지 않고 힘들지 않게 거드는 역할을 해야한다.

가족들이 서로를 돌보기 위해 자주 만나게 하는 역할을 바로 정책이 해줘야 한다.

좋은 정책은 가족 구성원이 서로를 돌보기 위해 모이게 하는 역할을 해야한다.


치매 요양원을 다니면서, 나는 이분들은 여전히 가족과 함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내 앞에 있는 내 아이들과 내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반 평생을 같이 살아온 내 배우자를 알아보지 못해도 치매 노인분들이 가족을 잊은 것은 아니다.


현재의 자신의 모습은 몰라보지만, 젊었을 적 자신의 사진을 보며 자신을 알아보는 스웨덴 할머니처럼,

신발을 가슴에 품고, 어머니한테 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나의 할머니처럼,

평생을 지내온 집을 떠나 지금은 요양원에 있지만 가족 사진이 빼곡하게 걸려 있는 방에서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시는 스웨덴 할아버지처럼,


이들은 가족을 절대 잊지 않았다.


이들이 우리를 잊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재만을 살아가는 우리의 생각일 수 있다.


돌봄의 영역에서 가족의 역할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정책적 뒷받침이 없고, 돌봄의 책임과 부담감이 오롯이 가족에게 전가되는 경우 돌봄을 대하는 가족은 사랑의 얼굴이 아니라 방관과 외면 혹은 원망이 담긴 비극의 얼굴을 드러낼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의 가족은 어떠한 얼굴을 갖고 있을까?


2017년 기준 65세 이상 노인중 치매 환자 수는 72만 5천면으로 추산되며, 이는 노인 10명 중 한명이 치매 환자인 비율이다. 우리나라의 치매 환자 증가는 상당히 빨라서 2024년 100만, 2041년 200만 그리고 2050년에는 270만명에 이를 것으로 보건복지부는 예측하고 있다. 유례 없이 빨리 진행되는 고령화와 더불어 치매 노인의 수 역시 빠르게 증가할 것을 예측된다. 하지만 이러한 통계적 사실과 반대로 현재 치매 노인에 대한  돌봄 제도는 부재한 상황이다.  


하지만 스웨덴에서 가족에게 치매 노인은 부담이 아니다.

그리고 이들은 여전히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다.


가족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가족을 잊어버렸다고 생각되어지는 치매 환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가족은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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