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종호 Sep 27. 2022

일상의 논어 <술이述而36>-탄탕탕坦蕩蕩


子曰 君子坦蕩蕩 小人長戚戚

자왈 군자탄탕탕 소인장척척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평정심을 유지하지만 소인은 감정 기복이 심하다."   



'군자는 탄한데 그 모양이 탕탕하고, 소인은 장한데 그 모양이 척척하다'의 대비적 구조로 문장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탄坦은 '평평하다, 평탄하다, 너그럽다, 밝다' 등의 뜻이고 '탕탕'은 '매우 넓고 큰 모양'을 의미하니, '탄탕탕'은 마음이 크고 넓어 웬만한 것에는 동요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탕은 방탕放蕩, 음탕淫蕩, 탕진蕩盡 등 부정적으로 많이 쓰이는 글자이지만 여기에서는 호탕浩蕩, 탕평(탕탕평평蕩蕩平平)처럼 긍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되었습니다. 


장長은 '길다, 자라다' 등의 뜻이고 '척척'은 '근심, 우울, 분노, 두려움, 슬픔'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일어나 불안정하고 조급한 기질이 드러나는 모양을 의미하니, 감정 변화가 심한 것입니다. 군자와 달리 마음에 평안과 고요가 자리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돌아보면 저도 소인의 전형적인 내면을 갖고 있었습니다. 명리와 주역을 깊이 탐구하고 불교 공부로 수양하면서 외물外物에 휘둘리는 마음이 점점 줄어들더니 어느 순간부터 오늘의 마음이 어제와 내일의 마음과 다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잠시 잠깐 흔들리는 마음도 이내 사그라듭니다. 저는 저의 경험을 통해 소인도 공부와 훈련을 통해 거듭날 수 있음을 압니다. 


동굴 속에서 달마達磨가 면벽참선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무릎 높이까지 쌓인 눈밭에 서서 혜가慧可는 자신의 왼팔을 자르기에 이릅니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피가 주위의 눈을 붉게 물들이는 풍경 속에서 혜가는 말했습니다. "스승께서는 부디 제 마음을 편하게 해주십시오." 오랫동안 혜가를 상대해 주지 않던 달마가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너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혜가는 절규합니다. "마음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달마의 말에 혜가는 깨닫습니다. "너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도다."


영화 '만다라'에서 지산은 창녀촌의 한 방으로 법운을 이끕니다. 그곳은 자신의 방황의 근원인 여자가 몸을 파는 곳이었습니다. 지산은 말합니다. "오죽하면 석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겠어? 만약 애욕 같은 본능이 하나만 더 있어도 수도길에 오를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어때? 내가 나가서 상대를 하나 구해 올까? 화낼 것 없네. 애욕에서 벗어나려면 여자를 알아야 해. 번뇌에서 벗어나려면 번뇌를 삼켜 버리는 거야. 건강한 사내라면 하루에도 열두 번쯤은 여자 생각이 나기 마련이야. 어디 한번 부닥쳐 봐. 망설임과 후회만 없다면 그게 부처의 길이라고.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는 부처의 길!" 지산의 말에 굳은 표정의 법운이 답합니다. "차라리 자르겠습니다." 법운의 말을 받아 지산이 껄껄껄 웃으면서 말합니다. "한 점 고깃덩어리를 잘라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자르려거든 마음을 잘라야지!"


이 대사는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도 이어집니다. 동굴 속에서 수행하던 진성은 어느 괴승에게 겁탈 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그는 사실 남근을 자른 사람이었습니다. 진성이 얘기합니다. "자르려거든 마음의 뿌리를 잘라야지 그 무슨 부질없는 짓입니까?" 비구가 답합니다. "도반 중에 열 손가락을 잘라 바친 사람도 있었소. 자꾸만 자꾸만 샘솟는 음심을 주체할 길이 없었소. 그것만 잘라 버린다면은 집착과 번뇌로부터 벗어날 줄만 알았지요. 석가는 왜 이 세상에 나와서 우리를 괴롭히는지 모르겠소."


평정심을 갖는다는 것의 어려움을 잘 보여 주는 사례들입니다. 부처가 되는 길도 군자가 되는 길도 평범한 보통 사람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임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은 불가능 그 자체를 말하지 않습니다. 육체를 훼손하거나 마음을 잘라야 한다고 입으로 되뇌는 방법으로 우리는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외물도 없고 마음도 없다는 가르침도 멀게만 느껴집니다. 


일반인들이 일상에서 평정심을 얻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라고 다 같은 마음이 아니기에 나의 마음이 작동하는 고유한 방식을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간장 종지에 담겨 있던 마음을 건져 호수에 풀어놓을 수 있게 됩니다. 명리학을 깨우치지 않았다면 제 마음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을 것입니다. 누가 툭 건들기만 해도 찬장 안과 식탁 위의 간장 종지는 요동치는 법이니까요. 무엇을 구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깊이의 것을 얻을 수 있는 학문이 명리학입니다. '돈안지유돈豚眼只有豚 불안지유불佛眼只有佛'일 뿐이지요. 


대통령의 막말을 두고 대통령 자신과 그 주변에서 더하는 말의 홍수는 그들이 나라를 운영하기엔 너무도 작은 그릇들임을 보여 줍니다. 간장 종지에서 나와 민심의 바다로 들어오면 될 것을, 그 기본을 죽어도 하지 않으려는 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나라와 국민의 비극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상의 논어 <술이述而35>-영고寧固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