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IX

by 오종호

소파에 널브러진 자세로 K의 연구 자료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벌써 백 번이 넘게 읽었던 내용이었다. 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글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밑줄 그은 부분들은 거의 외울 지경이었다. 이번에는 새로운 방법으로 읽어 보기로 했다. 문서의 맨 앞 글자들만 세로로 읽어 나갔다. 지겨웠지만 인내심을 갖고 읽었다. 만일 그런 식으로 메시지를 넣었다면 언제 어느 대목에 삽입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의미 있는 문장은 도출되지 않았다. 저녁마저 건너뛰고 영진은 다시 맨 뒤 페이지부터 앞 글자를 거슬러 읽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과연 그런 식으로 장치하고서도 논리적인 글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싶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K가 가까이에 남긴 답을 찾아야 했다. 700여 페이지의 앞 글자만 거꾸로 읽는 중이었다. 영진의 눈에 문장 하나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계속해서 글자들은 의미를 형성해갔다. 영진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 인간의 잔인함은 배신에 의해 그 절정에 도달한다.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던 그녀의 이별 통보가 내가 아는 그녀에게서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잔인함, 그것에 있다. 천사와 같았던 그녀를 일순간 악마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잔인함을 인간에게서 제거해야 한다. 그녀의 영혼을 인간에게서 구해야 한다. 그녀는 본래의 천사의 모습으로 회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장은 거기에서 끊겨 있었다. 영진은 순간 당혹스러웠으나 어쩌면 K가 메시지를 미리 작성해 두고 군데군데 나누어 배치해 둔 채 연구 자료를 작성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섯 페이지 앞에서 문장은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 저희들끼리 싸우며 지구를 남김없이 갉아먹는 것도 모자라 저희를 닮은 기계를 만들겠다는 인간의 저의는 무엇인가. 돈에 의해 구분된 저 완벽한 계급을 보라. 돈이라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갖지 못한 자들에게 시킬 수 없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꺼이 노예가 되기 위해 자발적으로 찾아올 수많은 인간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새로운 노예를 갖고 싶어하는 저 탐욕은 과연 어디에서 생기는 것이란 말인가. 인간을 닮은 보다 순종적이고 보다 똑똑한 노예에 대한 열망, 힘없는 인간과 인간의 유대를 붕괴시키고 싶어하는 권력자들의 음모. 세상은 한판의 거대한 거짓의 향연을 벌이고 있다.


글은 다시 끊어졌다가 무려 70페이지를 건너뛰고 다시 이어졌다.


- 인간을 닮은 기계가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인간을 닮는 순간 기계적으로 제거된 잔인함은 필연코 인간적으로 다시 발생될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서 잔인함이 제거되어야 한다. 인간을 닮은 기계를 원하는 자들에게 진정한 신의 모습을 보여 줘야 할 때다. 나는 인간이 되어야 하고 인간은 다시 신이 되어야 한다. 그녀는 신의 곁으로 가야 한다. 내가 사라진 후에도 그녀는 불멸한다, 미미. 축하한다, 영진. 당신은 답을 찾았다.


영진은 섬뜩함을 느꼈다. 미미. 지난 1년 9개월을 함께해 온 여자 미미. 미미가 K의 여자란 말인가. 그리고 영진. 분명 자신의 이름이었다. 영진은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영진은 급히 미미를 호출하기 위해 책상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모니터에서 미미는 찾아지지 않았다.


- 미미, 미미!


영진은 벽 앞에서 미미를 불렀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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