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일요일 저녁에 의무적으로 지속되었던 아내와의 통화가 중단된 지도 석 달이 지났다. 러닝 머신 위를 달리며 잠깐 동안 아내를 떠올렸던 영진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느덧 1년이 지났고 매달 어김없이 계좌엔 월급이 들어왔다. 어제는 급여 외에 회장이 약속했던 보너스 2억원이 현금으로 도착했다. 모니터의 바탕화면에 생성된 우체통 아이콘에 ‘1’이라는 숫자가 깜빡이고 영진이 클릭하자 맞은편의 벽면 한쪽이 정사각형 모양으로 갈라지며 앞으로 움직였고 그 위에 현금이 든 가방이 놓여 있었다. 영진은 차의 트렁크를 열고 가방을 툭 던져 넣었다. 이데리움에서 돈은 필요 없었다. 영진은 영원히 이데리움에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했다. 이데리움 안에서 결핍은 없었다. 결혼 생활에서도 불가능했던 성욕의 해소조차 완벽히 충족되었다. 미미는 예민한 대화 소재를 특유의 미소로 회피하였으나 불쾌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미미가 어떤 사연 또는 임무로 이데리움에서 근무하게 되었는지 영진은 묻지 않았다. 그저 자기처럼 이데리움을 선택해야 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었다.
이데리움은 만족스러웠으나 나가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었다. 영진은 이데리움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나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왕이면 빠르게 숙제를 해결하고 당당하게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답은 가까이에 있다는 말이 계속 입 안에서 맴돌았다.
강민 회장은 오랜만에 영상을 보내 왔다. 연말연시도 아무런 말없이 그냥 보냈던 그였다. 다소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아무리 많은 돈과 큰 권력을 손에 쥐고 있어도 언제까지나 강건한 몸을 유지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의 얼굴에서 전과 다른 초조함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여전히 힘이 넘쳤다. 그는 과제의 해결이 어렵겠지만 해내리라고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분명 이데리움 안의 보이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시에 향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교묘하게 영진에게만 하는 듯이 느껴졌다. 영진은 은근한 부담감을 선사하는 회장 특유의 화법을 익히 알고 있었다.
폴더를 터치하여 열었다. 그룹 자료 폴더에 날마다 새로이 올라오는 자료들은 거대한 생물체가 꼬물거리는 느낌을 주었다. 날마다 자기증식을 멈추지 않는 괴물 같은 몸집의 생물체. 자료는 많은 것을 말해 주었다. 거대 생물체의 몸에 붙어 있는 팔과 다리의 근육 상태부터 몸통 구석구석에 벌레처럼 매달려 있는 수많은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보이는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생물체는 날마다 자라나고 있었으나 눈에 띄게 균형을 잃어 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몸을 지탱하는 두 다리가 점점 흔들리고 있었다. 통신과 전자 사업은 매출과 이익에서 2년 연속 퇴보하였다. 모든 기기는 보이지 않는 선에 의해 서로 연결되고 있었고 점점 더 똑똑해지고 있었지만 새로운 시스템을 소비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는 한정되어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한 이후 더욱 심화된 상태로 고착화 된 불경기 하에서 소수를 제외하고는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첨단 자동화 시스템에 과감한 경제적 투자를 감행할 만큼의 여력이 없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외되고 있었다. 생계 수단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평범한 일자리들을 앗아가는 기술의 진보에 더욱 적대적으로 변해갔다. 돈벌이가 불가능해진 사회에서 억압된 인간의 기본적 욕구는 분노라는 화약을 품은 지뢰가 되어 사회 곳곳에 묻히고 있었다. 뇌관은 언제 불이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뜨겁게 달아오르는 중이었다. 그룹의 두 중심 사업 분야에서 생산하는 제품들은 보이지 않는 선에 의해 더욱 촘촘히 서로 연결되고 있었지만 그로 인해 사람들간의 관계의 해체는 가속화 되어 갔다. 거대 생물체는 비틀거리는 하체 위에서 위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데리움의 천정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분수는 여전히 공중으로 물을 쏘아 올렸지만 물방울의 비상은 빗방울의 낙하와 만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물방울의 최고점과 빗방울의 최저점 사이에 인간과 인간을 해체시키는 보이지 않는 선의 연결처럼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관계의 무덤처럼 보였다. 영진에게 그 무덤은 자신과 아내 사이에 솟아있는 것이기도 했다.
- 답은 가까이에 있다.
영진은 글자 하나 하나를 곱씹으며 계속해서 K의 문장을 되뇌었다. 대낮인데도 밤처럼 시커매진 하늘 아래로 빗방울은 더욱 거세게 추락했지만 빗방울들의 최후의 비명은 한 순간도 들려오지 않았다. 비가 퍼부을수록 이데리움은 더욱 적막해져 갔다. 이데리움은 진공의 세계였다. 가을비가 얼마 남지 않은 나뭇잎들의 생애를 장렬히 끝내는 동안, 영진의 곱씹음은 자음과 모음으로 해체되어 공중을 떠다니다가 사방에 부딪혀 쓰러졌다. 오전에 미미를 불렀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해맑게 웃고 있는 미미의 얼굴에서 안고 싶은 욕구는 생기지 않았다. 미미는 해맑은 얼굴로 점심을 들겠느냐고 물었지만 왠지 식욕이 일지 않았다. 미미는 자신이 도와줄 것은 없느냐고 몇 번이나 친절하게 물어 왔지만 영진은 오늘은 혼자 있고 싶으니 염려 말고 푹 쉬라는 말로 대신했다.
미미가 미지의 공간으로 떠나간 후 영진은 공식이 적힌 종이를 창문에 테이프로 고정시켰다. 남은 시간은 3개월이었다. 강회장이 며칠 째 두문불출하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진 이후 지난 3일 동안 언론에서는 강회장의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고 있었다. 만일 그렇다면 고령의 강회장을 대신해서 누가 그룹사의 후계자가 될 것이냐는 기자들의 가십성 기사들이 연일 쏟아지고 있었다. 숙제를 끝낸다면 영진이 맡을 수도 있는 계열사의 매출이 전년 동기간 대비 반 토막 난 여파로 주가가 연일 급락하고 있다는 경제 기사도 올라왔다. 그룹사 전체가 휘청거리고 있었다. 강회장은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을 것이었다.
- 젠장!
영진은 오른 주먹으로 창문을 쳤다. 창문은 낮은 신음을 토하는 듯 미세하게 진동하다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 쿵…
이마에서 미간을 타고 생뚱맞게 땀 한 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영진은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단숨에 목 안에 털어 넣었다. 식도가 얼어붙는 듯 맥주는 차가웠다. 영진은 차가운 물로 긴 샤워를 했다. 끈적이는 땀들이 씻겨 나가는 기분은 상쾌했다. 벗어둔 옷가지는 미미를 부르면 곧 챙겨갈 것이었지만 영진은 당분간 혼자 지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