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한 주역 <1.중천건괘重天乾卦>-초구

때가 아니니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

by 오종호



初九 潛龍 勿用

초구 잠룡 물용


-잠룡이니 쓰지 말라.



주역에는 팔괘가 있습니다. 건삼련(乾三連, ) 건괘, 태상절(兌上絶, ) 태괘, 리허중(離虛中, ) 리괘, 진하련(震下連, ) 진괘, 손하절(巽下絶, ) 손괘, 감중련(坎中連, ) 감괘, 간상련(艮上連, ) 간괘, 곤삼절(坤三絶, ) 곤괘입니다. 이를 소성괘小成卦라고 합니다. 건태리진 손감간곤, 이렇게 네 글자씩 읽으면 입에 잘 붙습니다. 리괘는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이 편합니다. 서른 번째 괘가 중화리괘인데 리괘로 익숙해지니 주역 공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공부를 하든 용어에 너무 민감할 필요는 없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면 점차 익숙해지니까요. 용어에 집착하다 보면 마치 러시아 고전 소설을 읽으며 스토리가 아닌 등장인물들의 낯선 이름에 질려서 읽기를 포기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을 맞을 수 있습니다. 주역을 철학, 고전의 관점에서 편한 마음으로 대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암기가 아니라 이해와 사유의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8괘를 서로 조합하면 64괘가 나오게 됩니다. 이를 대성괘大成卦라고 부릅니다. 대성괘의 위에 있는 소성괘를 외괘外卦(또는 상괘上卦), 아래에 있는 소성괘를 내괘內卦(또는 하괘下卦)라고 하지요. 괘명이 어떤 식으로 정해지는 지는 차차 저절로 이해하게 됩니다. 위의 팔괘에서 건삼련, 태상절과 같은 설명 역시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소성괘가 생긴 모양을 풀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팔괘가 상징하는 물상들, 인간관계 등을 암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해야지 무엇인가를 강제로 머릿속에 집어넣어 봐야 얻을 수 있는 통찰이 없습니다. 주역은 결코 인위적인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학문이 아닙니다.


중천건괘는 모두 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음이 전혀 없는 6양의 괘니 매우 남성적인 기운이 넘침을 알 수 있습니다. <설괘전> 7장에 '건건야乾健也'라고 했습니다. 건괘는 굳세고 강건함을 상징합니다. 명리학 기호를 이해하시는 분이라면 달로는 중천건괘가 사월巳月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습니다.


주역 대성괘에서는 양을 구九, 음을 육六이라고 부릅니다. 주역점을 치기 위해서는 노양, 소양, 노음, 소음의 개념을 알아야 하는데 <계사전 상> 9장에 공자의 오리지널 주역점법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만 알면 됩니다. 아래에서부터 효의 숫자를 매기니 오름차순으로 올라갑니다. 1효, 2효 이런 식으로 하면 쉬울 것 같아도 공부가 좀 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효와 6효에는 초初와 상上을 붙였습니다. 그 다음에 음양을 구분했고, 2효부터 5효는 음양을 먼저 구분하고 순서를 명시했습니다. 중천건괘의 1효는 양이니 초구가 됩니다.


'잠룡'은 물 아래에 잠겨 있는 용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에서 잠재적인 대선 후보들을 지칭할 때 언론에서 흔히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드러나지 않은 용이니 아직 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역점을 쳐서 이 효를 얻으면 자기의 시절을 만나지 못했으니 나서면 안 된다고 하늘이 일러주는 것이지요. 순응하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키우고 내공을 기르면 되는데 급한 마음에 무리하게 나선다면 그 결과는 자명합니다. 다음 기회조차 사라지고 말지요.


양인 초구가 음으로 변하면(이를 동動한다고 표현합니다. 명리학에서도 대세운에 따라 원국의 글자가 반응할 때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내괘는 손괘가 됩니다. <설괘전> 7장에 손입야巽入也라고 했습니다. 들어가는 것이니 물 속에 들어가 있는 잠룡의 의미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글자들이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차근차근 알아가는 것입니다.


초구가 음으로 변하면 괘 전체로는 44괘 천풍구괘로 바뀝니다. 이렇게 변하는 괘를 지괘之卦라고 부릅니다. 외괘는 그대로 건괘니 천天이요, 내괘는 손괘로 변화하니 손괘가 상징하는 바람, 곧 한자로 풍風이 되어 천풍天風의 괘상卦象이 되는 것입니다. 구는 만날 구(姤)입니다. 하늘과 바람이 만나는 것입니다. 이제 막 주역에 입문한 상태로 이와 같이 입체적인 학습에 욕심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 1괘부터 차례로 나아가면 언젠가는 44괘에 도달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64괘를 끝내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기분 좋은 날을 맞이하게 되니까요. 중요한 것은, 이제 겨우 첫 괘를 공부하기 시작하는 순간임에도 주역의 각 괘와 각 효는 이렇듯 다차원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과 뭐가 뭔지 감을 잡지 못하고 마치 영어나 수학을 공부하듯 무조건 페이지 순서대로 직진하는 것과는 천양지차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역은 두뇌 개발은 물론 의식의 확장, 통찰력의 증대 등의 엄청난 긍정성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니, 위대한 선인들이 아끼고 사랑했던 주역에 대한 강한 신뢰를 품으시고 차근차근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1괘 중천건괘의 초구는 때가 아니면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공통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시기일수록 나만은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행복과 불행의 질량은 균등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매를 먼저 맞느냐 나중에 맞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불행의 시기를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희망을 품고 사는 한, 행복은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은 천지 사이에 자신의 형상을 띠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만물이 자신의 생기를 확산하고 행복한 삶을 마음껏 펼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을 때가 되면 자연스레 아시게 될 것입니다. 타인은 어찌되든 말든 혼자만 더 행복하기 위해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섣불리 인간의 도리를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더 큰 불행이 뱀처럼 아가리를 벌린 채 당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뚫을 곤(丨)이라는 글자는 하늘에서 땅으로 곧장 내려온 형상입니다. 하늘의 이치가 고스란히 땅으로 전해진 것입니다. 그 이치는 사람의 입(口)을 통해 땅에 전해집니다. 그리하여 사람의 말이란 항상 하늘의 이치를 담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운데 중(中)입니다. 좌로든 우로든 치우지지 말고 중도를 지켜야 한다는 정치적 레토릭과는 전혀 상관 없습니다. 중용의 도로 타인들의 생각과 의견을 항상 존중하라는 의미입니다. 불행과 행복, 어느 하나를 회피하고 다른 하나를 자신만을 위해 추구하는 대신 항상 행과 불행의 이치를 이해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의 타인들의 입장에서 보편적이고 균등한 시각으로 바라보라는 얘기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사는 세상의 이치, 하늘의 섭리를 관통貫通하게 된다는 뜻도 있습니다. 중中이 상징하는 바가 곧 관통이요, 관통의 이치가 곧 통관通觀입니다. 통관은 의식의 교체요, 만물은 물론 천지의 이치를 단숨에 꿰뚫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안빈낙도의 자세로 살아갈 수 있는 잠룡이야 말로 현대 사회에서는 정말 행복한 존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퍼스널 브랜딩'이라는 미명하에 어떻게든 서둘러 세상 속으로 달려가고 싶은 많은 분들께 중천건괘의 초구의 속뜻이 유용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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