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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Mar 23. 2023

일상의 논어 <헌문憲問15~16>-휼이부정譎而不正


15~16장을 함께 정리합니다. 


子曰 臧武仲以防 求爲後於魯 雖曰不要君 吾不信也

자왈 장무중이방 구위후어노 수왈불요군 오불신야


-공자가 말했다. "장무중은 방읍을 다스리며 노나라에 자신의 후계를 세워 줄 것을 요구했다. 비록 임금에게 요구하지는 않았다고 말해도 나는 믿지 않는다."   



앞의 13장에서 장무중은 지혜로운 사람으로 등장한 바 있습니다. 


그의 집안은 노나라로부터 받은 방防 지역을 근거하여 살았다고 합니다. 삼환의 탄압을 피해 주나라로 망명했다가 방 땅에 숨어든 다음 조상의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자신의 이복 형 장손위를 자신의 후계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결국 원하는 바를 얻어 내기는 했지만 공자는 그의 처신과 태도를 좋게 보지 않고 있지요.


장무중에 대한 공자의 평가는 <<춘추좌씨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知之難也 有臧武仲之知 而不容於魯國 抑有由也 作不順而施不恕也 지지난야 유장무중지지 이불용어노국 억유유야 작불순이시불서야 - 지혜롭게 처신하는 것은 어렵다. 장무중에게 지혜가 있었음에도 노나라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한 데에는 그럴 만한 연유가 있다. 일하는 방식이 거칠고 베푸는 방식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즉, 머리도 좋고 아는 것도 많아 세상 이치에 밝았다는 소리를 들었을 지는 모르지만 예禮를 갖추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仁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얘기이지요. 지혜롭지도 않으면서 뭐 대단한 혜안이라도 있는양 일본에게 굽신거리며 국민을 무례하게 대하는 작금의 우리나라 권력자에 비하면 그래도 만 배는 나은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子曰 晉文公譎而不正 齊桓公正而不譎

자왈 진문공휼이부정 제환공정이불휼


-공자가 말했다. "진문공은 휼이부정했고, 제환공은 정이불휼했다."


 

 '속이다, 기만하다'의 뜻이니 위 구절은 "진문공은 권모술수를 쓰느라 정도를 따르지 않았고, 반대로 제환공은 정도를 추구했기에 권모술수를 쓰지 않았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런 식의 구분은 그리 설득력이 높아 보이지 않습니다. 


춘추오패 최초의 패자인 제환공은 포숙아가 추천한 관중을 재상으로 삼아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권력을 다투던 공자 규의 스승으로 자기에게 화살을 날리기도 했던 관중을 죽이려다 포숙아의 천거를 받아들이지요. 리더로서의 그릇을 갖추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간신들을 멀리하라는 관중의 유언을 듣지 않았다가 재상으로 임명한 간신배들에 의해 밀실에 유폐된 채 굶어 죽었고 훗날 구더기가 들끓는 모습으로 방을 나오게 되지요.  


진문공은 권력 승계 다툼으로 인한 내란으로 19년 간의 방랑을 견디고 끝내 권력을 잡아 패자의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재위 기간은 8년으로 짧았지만 고난의 세월 동안 다져진 연륜으로 진나라를 빠르게 강대국의 지위에 올렸습니다. 그의 사후 한 세기 동안 진나라는 초나라와 함께 초강대국으로 군림했고 이후 진나라가 위나라, 조나라, 한나라로 쪼개졌어도 전국칠웅의 지위를 누렸던 만큼, 진문공의 역할은 지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후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역경을 딛고 일어났기에 재미있는 일화도 많이 남긴 인물입니다.   


그 중의 하나를 소개합니다. 진문공의 망명과 유랑 시절, 두수라는 자는 돈과 음식을 챙겨 달아난 배신자였습니다. 뻔뻔하게도 진문공의 즉위 후 찾아와 혀를 길게 뽑지요. "제가 잘못을 한 것은 맞사옵니다. 하지만 주군. 주군께서 저를 용서하고 등용하신다면 주군께 등을 돌렸던 사람들은 주군의 마음이 진심임을 알고 모여들 것입니다." 속으로는 쳐죽이고 싶었겠지만 진문공은 관용을 베풀어 그에게 궁궐 창고 관리 자리를 내어 줍니다. 덕분에 두수는 천수를 누렸고, 진문공은 나라 발전에 필요한 유능한 인재들을 많이 얻게 되었습니다.


반면, 두수의 배신으로 인해 아사할 위기에 처한 진문공을 위해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였던 개자추는 논공행상에서 누락됩니다. 그는 노모를 모시고 면산으로 들어가 은둔해 버리지요.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진문공이 개차추를 찾지만 산 깊숙이 은거한 그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산에 불을 지르면 나올 것으로 생각했으나 진문공의 생각과 다르게 두수는 노모를 끌어안고 불에 타 죽고 말았지요. 


<<사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듯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왕조사와 인물사란 사실상 권도權道의 역사입니다. 드넓은 대륙을 차지하려는 권력자들의 야망과 그들의 야망이 실현되도록 돕는 책사들의 온갖 권모술수가 드라마틱하게 펼쳐지지요. 진문공과 제환공으로 휼과 정을 구분 짓는 것은 덧없는 일일 것입니다. 


부와 명예를 좇는 인간의 본능은 문명화 된 오늘날에도 추잡한 권모술수가 난무하게 만듭니다. 국민이 무식쟁이, 거짓말쟁이, 위선자, 배신자, 매국노에게 권력을 쥐어 주는 일이 일어나는 까닭은 정正의 가치가 무너졌기 때문이지요. '민주주의는 필요없다. 부패해도 좋다. 부패가 무능보다 낫다'는 해괴망측한 프레임이 등장한 이래로 이 나라에는 부패가 만연하고 무능한 자들이 권력과 이익을 나눠 갖는 천박하고 악랄한 사회로 전락했습니다. 정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니 바로 서려다가도 무너져 내리는 것이지요. 


부패한 자들은 결코 유능할 수 없습니다. 부패한 자들은 결코 국민을 위해 일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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