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드가 떠나간 숲의 입구에 문이 나타났다. 그것은 지드의 새하얀 털을 닮아 있었다. ‘이번에는 신을 만날 수 있는 건가?’ 생각하고 있는 사이 문이 활짝 열렸다.
문 안쪽에는 바다가 있었다. 오랜만의 바다였다. 그녀를 떠나 보내고 처음 만나는 봄 바다였다. 나는 유채꽃 밭을 지나 고운 백사장 안으로 들어섰다. 발 밑에서 모래가 아삭거렸다. 바다 위에서 파도가 느리게 물러났다가 느리게 다가왔다. 그것은 너무도 느려서 눈을 떼지 않고 한참을 바라봐야 겨우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바다를 좋아했다. 어디에서든 2~3시간이면 아무 바다에나 도착할 수 있었지만 한나(Hannah)와 헤어진 뒤로는 바다를 찾지 않았다. 그녀 없이 홀로 바다 앞에 설 때의 슬픔을 대면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모든 슬픔이 해일이 되어 한꺼번에 나를 덮치기라도 하면 나는 분명 무너졌을 터였다. 한나는 나에게 슬픔이었다.
그녀와 헤어지고 견뎠던 하루하루처럼 파도는 느리게 밀려가고 아주 느리게 밀려왔다.
바다 끝에서 하얀 물체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점점 커져 배의 형체로 살아났다. 배는 빠르게 다가왔다. 그것은 지구의 모터보트 형체를 띠고 있었다. 보트는 날렵하게 바다를 벗어나 백사장으로 올라온 뒤 크게 커브를 그리며 내 앞에서 멈추었다.
“타세요.”
짙은 선글라스를 낀 미모의 여자가 긴 생머리를 나부끼며 말했다. 소금을 닮은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내가 오르자 보트는 방향을 틀어 바다 위에 몸을 얹고 힘차게 달려 나갔다. 아무런 소음을 내지 않는 보트는 마치 물 위를 떠가는 듯 부드럽게 질주했다.
“당신이 신입니까?”
“아뇨.”
“어디로 가는 거죠?”
“당신의 신을 만나러 갑니다.”
“나의 신?”
“네. 가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가이드(Guide)입니다. 자격 있는 자를 신에게로 안내하지요.”
여자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선글라스에 뜬 두 개의 태양이 아름다웠다.
“이것은 바다입니까?”
“신의 양수이지요. 지구 위의 모든 생명들은 이곳을 거쳐 태어납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여자의 말에 나는 뱃전에 하체를 단단히 기대고 배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바다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투명한 물 속을 수직으로 파고든 시선에 인간과 동물 형상의 물체들이 포착되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이 형형색색의 끈과 끈으로 연결된 채 잠들어 있었다.
“바닥까지 생명들로 가득 차 있는 건가요?”
“네. 가장 아래에 있는 생명부터 지구에 태어나지요.”
“그렇군요. 저 알록달록한 끈들은 뭡니까?”
“인연선입니다.”
“인연선?”
“하나의 생명체가 자신의 생애 동안 맺는 인연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선의 색깔은 인연의 유형을 나타내고, 선의 길이는 인연의 지속을, 선의 굵기는 인연의 강도를 보여 주지요. 인연의 좋고 나쁨 또한 구별되어 있습니다.”
“실처럼 얇은 선도 보입니다.”
“지구에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지요? 그런 인연조차 모조리 다 계획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생명들과 생명들의 인연까지 다 신이 의도적으로 만든다는 것입니까?”
“예외의 경우는 있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설명 드릴 권한이 제게는 없군요.”
바다는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 위를 흰 보트는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바뀌지 않는 풍경 속에서 나는 보트가 그저 제자리에 머물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드러나는 물 속 풍경은 배가 엄청난 속도로 전진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가이드가 말한 예외라는 단어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