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기계 - 6. 순간

by 오종호

어느 정도의 거리를 달려온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마침내 섬이 보였다. 가이드는 섬의 선착장에 보트를 부드럽게 멈추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세요. 그럼 이만.”


가이드는 짧은 미소를 건넨 후 다시 보트를 몰고 바다 한가운데를 향해 나아갔다.




계단은 섬의 정상을 향해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섬의 가운데에 우뚝 솟은 산 정상으로 이어진 돌 계단은 한나와 걸었던 오래된 산사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산 중턱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다는 아름다웠다. 파도가 없는 바다는 끝이 없는 호수처럼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은 실재하는 것일까?’


신에게 듣기 전에는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만일 그렇다면 지구의 바다는 신의 상상력과는 무관한 것이리라. 신은 그저 자신의 세계를 모방한 것일 테니까. 핵심 질문은 다만 한가지였다. 인간의 삶이 운명 지워진 것이라면 프로그램 된 인간의 세계를 만들고 운영하는 것에 담긴 신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다.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신은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그가 나의 요청에 응한 것은 내가 인간과 세계의 실체에 접근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 지점에 위치한 진실을 보여 주고자 함일까?

그가 나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은 폭포를 건너온 이후의 경험으로 분명해졌다. 신은 어떤 모습일까? 그 역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것은 위장일까, 아니면 인간의 외형 역시 그저 신의 형체의 모방품일 뿐일까?


나는 신을 만나고 싶어졌다.




갈증을 느끼며 계단의 끝에 도착하자 붉은색 문이 나타났다. 문에 달려 있는 문고리를 잡고 두드리자 문이 안으로 열렸고 나는 안으로 들어섰다.


문 안쪽은 흡사 5성급 호텔 라운지 느낌이 나는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장소였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통 유리창 앞에 서 있던 빨간 드레스의 여자가 미소를 띠며 내게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저기에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여자는 방금 자신이 서 있던 창문 앞의 소파를 가리키며 말한 다음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무엇인가를 쟁반에 받쳐들고 나타났다.


“드세요. 갈증과 피로가 풀릴 거예요.”


여자가 건넨 와인 잔에 담긴 붉은색 음료를 마시자 삽시간에 갈증과 함께 몸에 켜켜이 앉아 있던 피로감이 사라졌다.


“특별한 음료로군요.”


진심으로 감탄하며 내가 말했다.


“그렇지요?”


맞장구 치며 여자가 내 맞은편의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여기까지 오시는데 불편한 점은 없으셨나요?”

“예, 전혀요.”

“오늘은 이곳에서 하루 푹 쉬시면 됩니다. 당신의 신과는 내일 만나시게 될 거예요. 오늘 마침 신들의 정례 회의가 있는 날이라서.”

“신들의 수가 많은 모양이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신도 신입니까?”

“아뇨. 저는 당신의 신을 모시고 있는 버틀러(Butler)입니다. 당신의 신을 보좌하는데 필요한 여러 일들을 두루 담당하고 있지요.”

“저 이전에도 이곳에 온 인간들이 있었나요?”

“제 전임자 때의 일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제가 일하기 시작한 이래로는 당신이 처음입니다.”

“그렇군요.”

“925호 VIP룸에서 묵으시면 됩니다. 저녁 식사와 내일 아침 식사는 룸 서비스로 제공됩니다.”


여자가 황금색 카드 키를 건넸다.


“그리고 자유롭게 선택하시면 됩니다.”

“예? 뭘 말인가요?”

“9층에 도착하시면 아시게 됩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여자가 안내해 준 황금색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문이 닫히는가 싶더니 곧바로 문이 열리고 9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곡선형의 복도가 나타났고 복도 양쪽 벽에서 온갖 영상들이 재생되고 있었다.

나는 영상들을 천천히 확인하며 걸었다. 그것들은 내 기억 속에 잠들어 있는 장면들이었다. 모든 영상은 내 뇌리 속에서 행복한 순간들로 저장되어 있는 것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영상 속에서 어린 시절의 나는 친구들과 축구를 하며 활짝 웃고 있었고, 형제들과 야구를 하며 웃고 있었다. 학교에서 상장을 받으며 웃고 있었고, 대학 시험에 합격해서 웃고 있었다. 동료들과 술을 마시며 웃고 있었고, 강연 무대에 올라 웃고 있었다. 그리고 한나와 함께 사랑을 나누며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빨간 드레스의 버틀러가 한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한나와 행복했던 때를 선택했다. 나는 웃고 있는 한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선택되었습니다.’


영상 위에 문장이 떠올랐다. 그러자 다른 영상들은 모두 사라지고 내가 선택한 것만이 벽 전체에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복도 끝에 황금색 문이 나타났고 문에는 ‘VIP 925’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카드를 대자 문의 잠금 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자그맣게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사진으로만 보았던 고급 호텔의 스위트 룸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지구 전역에서 구해온 듯한 가구와 장식품, 그림이 즐비했다. 카펫의 부드러움은 신발을 신고 있어도 그대로 느껴졌다. 나는 방의 모든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너른 공간에 나 외엔 아무도 없었다.


‘내가 뭘 기대한 거지?’


쓴 웃음이 나왔다. 괜한 허탈감이 밀려와 침대에 털썩 몸을 뉘였다. 침대 옆 통 유리를 통해 바다가 한아름 달려들었다.


신은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모처럼 여행을 떠난 기분으로 마음껏 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안락한 침대는 나를 스르르 잠으로 이끌었다.




“오빠, 잘 잤어?”


눈앞에서 한나가 커다란 눈동자를 반짝이며 미소 짓고 있었다.


“한나?”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한나, 나의 한나, 꿈에 그리던 한나였다.


“무슨 오랜만에 보는 사람처럼 그렇게 쳐다보냐? 꿈이라도 꿨어?”

“여, 여긴 어디지?”

“정말 꿈꿨나 보네? 어디긴 어디야. 우리 제이 아일랜드(J Island)에 여행 왔잖아. 얼른 정신 차리고 이리 와봐. 여기 노을 장난 아니다.”


한나가 등을 돌려 창가로 걸어갔다. 한나의 나신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오래 전 그녀와 제이 아일랜드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길게 사랑을 나누었다. 시간이 영원히 멈추기를 소망했던 순간이었고,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순간이었으며, 언제나 그리워했던 순간이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오빠, 뭐해?”


한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오빠, 울어? 왜 울어?”

“아냐, 울기는. 그냥 너무 행복해서.”


한나가 다가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치이. 나 감상 그만하고 이리 와봐.”


한나는 내 손을 잡고 창문 쪽으로 이끌었다. 하늘은 진홍색으로 불타고 있었다. 하늘을 가득 채운 노을이 바다를 물들여 바다와 하늘이 만난 곳은 온갖 빛깔이 잔치를 벌이는 듯 어우러져 있었다.


“너무 예쁘다, 그치?”

“그래, 예쁘다.”


하지만 세상 어느 것도 한나 너만큼 아름다울 수 없다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그런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세상 어딘가에 한나가 있어서 나는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 그 시절에 나누었음직한 밀어를 속삭이며 그녀를 기쁘게 해주었다. 그리고 망설이던 말을 하기로 했다.


“한나?”

“응?”

“만약, 만약에 말야.”

“뭔데 이렇게 뜸을 들이실까?”


한나가 내 코를 쥐고 살짝 비틀었다.


“그럴 리는 당연히 없겠지만 혹시라도 언젠가 내가 한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보내거나 이메일을 보낸다면 말야. 그거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해.”

“호호, 무슨 말이야 그게.”

“그러니까 내가 내 입으로 직접 하지 않는 말은 다 거짓말이야. 뒤죽박죽 된 글로 된 모든 것, 그런 것에 상처 받지 말아야 해. 만일 내가 그런 글을 보낸다면 말야. 한나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그래도 한나는 보내 줘야 해서, 한나 곁에 나를 머물 수 없게 만들려면 그 방법 밖에 없어서 그렇게 했을 거라고 생각해 줘. 상처 받지 말아야 해.”

“우리 오빠 오늘 정말 이상한데? 흠. 요즘 글을 너무 많이 쓰더니 정신이 오락가락 하시나? 오빠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나에게 상처를 주겠어? 이리 와. 내가 정신차리게 해줘야겠음.”


한나는 나의 손을 잡고 침대로 이끌었다. 나는 현실에서 말하지 못한 부질없는 말들을 늘어놓으며 안도했다. 그냥 이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