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의 후문으로 나가자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산의 계단 아래에서는 정상에 이토록 넓은 땅이 있을 것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드넓은 대지였다. 융단 같은 잔디와 형형색색의 꽃들, 그리고 뭇 짐승들이 어우러져 행복한 표정으로 노닐고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진짜입니까?”
“진짜와 가짜의 경계란 허상 아니겠나? 내가 직접 가꾼 세계라는 점에서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실재한다네. 저 양수 속에 잠들어 있는 모든 것들이 실재하는 것처럼. 하지만 언제든 무로 되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 동시에 그렇지 않은 것이기도 하지. 우리 설계자들은 시공의 변형이 가능하네. 그래서 지구에 적용되는 차원에 머물러 있는 인간의 사유로는 우리의 실재 개념을 이해하기엔 좀 어려울 것이야.”
설계자가 상체를 숙여 꽃봉우리에 코를 대며 말했다.
“자네는 궁금할 거야. 설계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렇다면 설계자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리에게도 시작이라는 게 있을 텐데 그렇다면 우리를 만든 또 다른 존재가 있는 것은 아닌가? 왜 아니겠나? 자네는 나의 분신인데 말이야. 나 역시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오랫동안 찾아 헤맸다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그런데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네.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 지구 위의 인간들에게 내가 심어 놓은 유한한 삶과 생존에 대한 본능은 그들로 하여금 신이라는 개념을 만들게 했지만, 설계자인 나 역시 누군가의 피조물이라면 나의 삶이라는 것도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가 회의가 들기 시작한 시점이었지. 생각해 보게. 삶의 근원을 알지 못한 채 이어가기만 하는 삶, 무료한 살아 있음, 그런 것은 과연 연기된 소멸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물론 노화를 멈추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 인간들이 들으면 복에 겨운 소리라고 하겠지만. 하하. 다른 설계자들이 이곳을 닮은 완벽한 세계들을 만들고 더 아름답게 가꾸는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나는 불완전한 지구와 나약한 인간들을 만들었어. 말했다시피 순전히 내 의지만은 아니었지. 나는 나에게 내려온 계시가 내 해답을 찾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알고리즘의 불완전성을 야기해도 좋은 허락처럼 느껴졌다네. 인간은 하나의 패턴일 뿐이야. 나의 관찰과 분석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이지. 싯다르타를 보며 나는 힌트를 얻었다네. 인간에게 뛰어난 지성을 부여하고 삶에 고통을 가할수록 유익한 것들을 얻을 수 있었어. 동일한 고통스러운 운명 피라미드를 부여해도 어떤 인간은 포기하고 죽어 버리고 어떤 인간은 끝끝내 살아남더군. 그 중의 일부는 나와의 접속을 시도했고. 그 차이를 낳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짜놓은 길에서 저들을 이탈하게 만드는 동력은 무엇일까? 나는 궁금했다네. 내가 심어 놓은 겨우 1%의 자유도가 99%의 정해진 틀을 이겨내게 만드는 힘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신기했지. 신기하고 말고. 자유도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조건적인 것에 불과하잖나? 인간은 육체를 벗어 던질 수 없으니까. 일단 살아 있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나는 인간을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생존 본능을 제거하면서까지 부질없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인간들에게는 확실히 경이로운 데가 있었어. 자네도 내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우리에게는 희생의 개념이 있을 수 없단 말이야. 일회성 죽음을 초월한 존재들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들을 보며 알지 못하는 앎의 존재로 인한 나의 고통이 시작되었네.”
설계자는 갑자기 나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자네를 눈여겨보기 시작했지. 자네의 운명을 가진 자들은 절반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나머지 절반은 시스템에 순응한 채 무기력한 삶을 반복했네. 오직 자네 만이 버티고 견디기를 포기하지 않더군. 언젠가 자네의 윤회 기록을 모두 살펴봤어. 이 친구는 왜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가? 나는 궁금했다네. 그러다 알게 되었지. 어떤 오류로 인해 자네에게 만큼은 자유도가 너무 많이 부여되었더군. 10%를 넘었으니까. 그것은 전례 없던 일이었지. 자유도가 높아지면 인간은 버티는 것인가, 나는 그때부터 같은 피라미드 속에서도 자유도의 비중을 조절하기 시작했지. 그런데 별반 다를 게 없는 거야. 나는 무려 천 번이 넘는 시스템 리셋을 통해 실험 대상들의 자유도를 모조리 바꾸면서 살펴봤다네. 지구는 이미 천 번이나 같은 역사를 반복해 왔다는 얘기야. 결론은 10%를 넘는 자유도로도 인간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어. 자네만이 특이한 케이스였던 것이지. 그래 돌연변이라는 표현이 적당하겠군. 자네의 그 돌연변이성, 인간의 사회 시스템에도 길들여지지 않고 나의 알고리즘에도 온전히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자네라는 인간에게 나는 무한한 흥미를 느꼈지. 그래서 자네에게 이번에 나와 똑같은 외모를 선사했다네. 물론 자네에게는 불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야. 하하하.”
“저에 대한 관찰을 통해 당신의 해답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습니까?”
“응, 조금은.”
“인간에게 더 큰 고통을 선사하겠다는 것 말입니까?”
“그것을 꼭 그렇게 해석할 필요는 없네. 자네야 말로 고통의 산물이니까. 확실한 것은 고통을 극복하는 인간은 업그레이드된다는 사실이야. 그것은 우리 세계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된 셈이지.”
“당신 세계가 직면한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