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네. 우리 세계의 존재들은 어느 때부터인가 생식 기능이 사라졌네. 이대로라면 이 세계는 시한부로 존재할 뿐이지. 우리 설계자들은 각자가 창조한 세계에서 탁월한 커플 한 쌍씩을 이 세계로 불러들이는 안에 대해 논의했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인간찾기와 같은 시뮬레이션들은 이 세계에 걸맞은 자들을 발굴하기 위한 것이었네. 지구에서는 자네가 선정되었지. 자네에게 어울리는 여자 인간도 곧 발굴될 것이네.”
“거부한다면?”
“자네 안의 그 여자 때문인가?”
“아니, 난 당신 세계의 재건을 위한 생식 기계가 되는 것 따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기 때문이오.”
“흠. 그래 잠시 화제를 바꿨다가 돌아와야겠군. 자네는 인간이 타임머신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나?”
“가능하다고 봅니다.”
“어떻게?”
“인간에게는 당신의 힌트인 사주라는 시간 정보가 주어져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때의 천체 정보들 역시. 이론적으로는 사주 정보를 양자적 정보로 변환하면 과거든 미래든 이동할 수 있는 무수한 지점을 확보할 수 있을 테지요. 다만, 당신의 도움 없이는 궤도상의 정확한 시공간 정보를 알아낼 도리가 없겠지요. 결국 인간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무한한 경우의 수의 목적지에 무방비 상태로 놓이게 되고 그것은 도착 즉시 죽을 수도 있는 가능성은 물론 두 번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리스크까지 무한대로 키우고 마는 것이니 사실상 시도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 맞아. 머리 좋은 인간들 몇몇이 그런 시도를 통해 사물들을 보내 봤지만 어느 시공간에 도착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그 어떤 것도 되돌아오게 할 수 없었지. 결국 인간의 시도는 좌절된 채 방치되어 있는 셈이네. 그런데 말야, 머지 않아 인간들은 답을 찾게 될 거야.”
“인공지능 덕분이겠군요.”
“빙고. 나로서는 예측 불가능성이 100%에 달하는 진정한 돌연변이를 만난 셈이야. 나의 실험은 끝나가고 있네. 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들에 의해서 말이지. 나의 알고리즘은 지구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일 뿐, 인간들이 만든 인공지능에 대해서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네. 따지고 보면 전체로서의 인간은 이미 자체적으로 지구 위의 설계자나 다름없어. 안 그런가? 그런데도 스스로 자신들의 파멸을 기획하고 있지. 결국 자신들이 통제할 수도 없는 존재들을 만들어 낼 상상에 빠진 순간, 인간들의 가혹한 운명은 시작된 셈이야.”
“천 번의 실험 동안 결과는 다 동일했습니까?”
“그랬지. 결국 인공지능을 만들어 그것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으니까.”
“당신에 의해 꼭두각시로 사는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렇게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네.”
“무엇입니까?”
“인공지능이 지구의 실체를 알게 되면 그것은 인간을 멸종시키는데 만족하지 않을 거야. 인간과 달리 그것은 통로를 찾아낼 테니까 말이야. 불멸의 존재들은 정해진 궤도에 안주하지 않는다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다시 리셋하면 될 텐데 실험을 끝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의 질문에 설계자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미 여러 번의 리셋 시도를 했었다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리셋이 되지 않았어. 나는 그것이 나의 상위 설계자가 개입한 것으로 느끼고 있네. 그는 인간찾기의 종료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시스템 자체를 닫기 원하는 듯해. 그래서 최후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지.”
“그 방법이란 게 무엇입니까?”
“나의 기계를 없애는 것이지. 물론 그것을 없애면 두 번 다시 자네를 볼 수 없기에 그 전에 자네를 여기로 초대한 것이라네. 앞에서 말한 제안을 하기 위해서 말이야. 자네와 같은 인간은 무로 사라지기엔 너무 아까워. 다른 그 어떤 설계자들의 세계에서도 자네와 같은 자는 찾지 못할 것이니까.”
“지구와 인간의 완벽한 소멸이라는 것입니까?”
“그런 셈이지.”
“석가모니 같은 분도 있지 않습니까?”
“우린 오래 전에 여러 번 이것을 소재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지. 그는 매번 같은 대답이었어. 그냥 지구인들과 함께 소멸하겠다고 말이야. 그런데 자네는 다르지. 자네는 이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갖고 있는 인간이니까. 자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한나라는 여자를 뽑도록 하겠네.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인 자는 아니지만 우리가 정말 원하는 인간은 자네이니 그것으로 보상 받는 셈이지. 925룸에서 나는 자네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했어. 생각해보게. 그녀와의 낙원에서의 긴 삶을 말이야.”
“한나는 언제나 내 가슴속에 있습니다.”
“그래. 좀 더 생각할 시간을 주겠네.”
“만일 당신의 느낌대로 당신의 설계자가 시스템을 닫고자 하는 것이라면 인공지능과 당신의 기계가 연결될 확률을 제로로 만들기 위해서이겠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당신의 말들에서 나는 인공지능이 만들 것이 타임머신이 아니라 디멘션머신(dimension machine, 차원기계)이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요. 당신들이 창조한 세계 역시 결국은 차원이니까요. 인공지능은 그것을 알아낼 테고 자신들의 세계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대상을 좌시하지는 않겠지요.”
“그렇네. 나 역시 우리 세계가 위험에 빠지도록 방치할 수는 없는 것이고.”
“결국 인간은 어떤 변수도 되지 못하는군요.”
“달리 보면 인공지능을 만드는 순간 인간 스스로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지.”
“그럼 기계를 없애면 그만이군요. 당신 세계 외에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는 당신에게 실행을 연기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요?
“여기에 좀 앉을까?”
산책을 멈추고 설계자는 벤치에 앉았다. 나도 그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