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와 내가 기계에 동시에 두 손을 얹자 정보들이 내게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감은 눈 앞으로 기계에서 엄청난 밝기의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천 번이 넘는 지구의 리셋 동안 매번 후반부 열 번의 삶을 반복해서 살았다. 나는 광야를 거닐었고, 버려진 땅에서 사람들을 보살폈다. 나는 총칼을 들고 적과 싸웠으며, 침을 들고 사람들을 살렸다. 나는 학자가 되어 사람들을 가르쳤으며, 부와 명예를 누렸다. 나는 극한의 가난을 겪으며 성공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사람들의 배신에 의해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나는 토굴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했으나 깨우치지 못했다. 나는 고승이 되어 절을 짓고 부처를 모셨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으나 그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는데 실패했다. 나는 작가가 되어 많은 책을 썼으나 인정 받지 못했다. 나는 자주 자살의 유혹에 시달렸으나 명리학을 공부한 후 마음을 고쳐먹고 주식투자법을 연구하여 큰 돈을 벌어 아름다운 보육원을 짓고 아이들을 행복하게 키우는 일에 매진했다. 그것은 인간의 운명을 고통에서 행복으로 바꾸기 위한 인간의 기획이었다.
잊혀졌던 나의 미래는 나의 구상대로 이루어졌던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 미래는 이제 어디에도 없게 될 것이었다.
끝난 줄 알았던 기억이 어둠을 가르며 이어졌다. 나는 한나와 함께 현실에서 달아나려다 마음을 바꾸고 한나와 헤어지기로 했다. 나는 의도적으로 한나의 마음을 괴롭히는 메시지와 이메일을 보냈고 답장이 오면 함부로 말하여 그녀가 나에 대한 정을 떼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고통스러웠고 고통이 커질 때마다 그녀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을 때까지 같은 짓을 반복했다. 나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극도로 우울했고 그 우울 속에서 나는 그녀를 책임질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내 삶에서 사라졌다.
계속된 다음 생의 기억에서 한나는 천재 과학자였다. 한나는 디멘션머신과 인공지능을 발명했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었던 한나의 선한 인공지능은 어느 순간 인간을 살육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전쟁 수단으로 악용한 인간들 때문이었다. 한나는 디멘션머신을 이용해 인공지능을 다른 차원으로 사라지게 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한나의 인공지능 연구에 돈을 댄 기업의 한 연구원에 의해 한나의 디멘션머신 발명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 자는 나였다.
나는 한나의 디멘션머신을 활용해 지구를 완전히 통제하려는 기업의 야욕에 부응해 한나의 연구 업적을 모조리 살폈다. 그러면서 나는 한나가 왜 그 기계를 만들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한나는 지구의 종말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새로운 행성들로 지구인들을 분산 이주시키려 한 것이었다. 그곳들은 이미 인공지능 로봇들에 의해 인류를 위한 문명 기반이 구축된 상태였다. 한나가 원한 것은 모든 인간과 생명들이 경쟁할 필요 없이 평화롭고 윤택한 삶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준비해 두고 세상에 발표하려고 했으나 지구에 세계대전이 터진 것이었다.
나는 한나를 구하겠다고 결심했다. 연구를 위해 알아야 할 것이 있다는 핑계로 나는 디멘션머신이 있는 방에서 한나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반드시 구해 내겠다고, 나는 한나에게 말했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한나는 고개를 저었다. 한나는 많이 아파 보였다. 대신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계획을 내게 들려주었다. 그녀는 말했다.
“디멘션머신이야말로 인공지능 중의 인공지능입니다. 이것으로 지구의 전쟁을 막을 수 있어요. 대신 당신의 진짜 결심이 필요해요. 지구를 살리기 위해 지구를 떠나겠다는 결심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것이 없어지면 전쟁은 멈출 거예요. 하지만 지구는 이미 생명이 살기 어려운 땅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요. 당신은 떠나야 해요. 그곳에 가면 당신은 지구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요? 당신도 나와 함께 갑시다.”
“내 몸은 이 여행을 이겨낼 만큼 강한 상태가 아니랍니다. 양자 정보로 바뀐 육체가 다시 만들어지려면 최소한의 생체 에너지가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나도 같이 가는 것과 다름 없으니까. 시간이 없어요. 결정해 주세요. 인간들이 오기 전에 마쳐야 해요.”
나는 한나의 맑은 두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나는 나의 손을 잡아 디멘션머신의 특정 위치 앞으로 이끌어 나의 두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은 반대쪽으로 가서 마찬가지로 기계 위에 손을 얹었다. 한나는 미소 짓고 있었다.
순간 한나의 몸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양자 정보로 변환된 한나의 몸이 나의 가슴속으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밖에서 인간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우리를 지켜보던 누군가가 인간들에게 알렸을 것이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한나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동안 잠들어 있던 나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한나는 내가 사랑했던 나의 그 한나였다.
“당신이 그 사람이었군요. 그랬군요. 고마워요. 정말 다행이예요.”
한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가슴이 벅차 올라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인간들이 문을 열고 나를 향해 뛰어왔다. 눈물 때문에 그들의 형체는 알아보기 어려웠다. 나는 흩어져 디멘션머신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인간들 앞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