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장VI

by 오종호

“무릇 세상에 인연이 아닌 것이 없으니 만남은 만남 대로 헤어짐은 헤어짐 대로 모두가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어긋난 인연은 그것으로 끝인 것이니 모든 인연의 끝에서 각자 새로운 인연의 끈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어가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미 매듭지어진 인연을 현재의 것으로 주장하고 있으니 이는 마치 복숭아 나무를 두고 원래는 그대가 육 년 전에 먹고 버린 복숭아 씨였으니 나무를 내놓으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따름이다.


이 개는 자신에게 다가온 인연의 끈으로 자신만의 삶을 살았으니 어찌 삶의 주인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이 자그마한 암자에 한 때 머물렀던 인연의 끈으로 오늘 이렇게 서로 똑 같은 미혹된 소리만을 지껄이고 있으니 필시 같은 주인을 섬기는 것인즉, 그 명령에 따라 이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그대들이 헛된 사욕으로 떠드는 소리가 산짐승들의 귀를 더럽히고 그대들의 입에서 나오는 썩은 내가 나무들의 숨을 막고 있으니 그만 썩 물러가길 바란다.”


편재 스님의 음성은 잔잔한 바람처럼 고요한 산사의 곳곳을 파고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세 사람을 안됐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여생을 즐기려고 했지만 뭔가가 어긋난 것이 틀림없는 노인이 허공을 향해 고개를 흔들며 지팡이로 땅을 힘껏 내리치고 말했다.


“개가 삶의 주인이라니 저 무슨 듣도 보도 못한 헛소리인가. 우리 둘은 다만 저 여인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역시 억울하게 제 주인에게서 떨어진 불쌍한 개를 원주인에게 찾아주기 위해 이렇게 왔을 뿐, 당신이야 말로 충직한 저 여인의 개를 이용하여 세간의 관심을 받고 돈을 벌고자 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당장 개를 내놓으라.”


“허허허. 그대들의 신을 모시는 곳에서 사람들이 붐비는 이곳을 질시하는 이유는 내 충분히 이해하겠다. 허나 그것은 그대들의 뜻일 뿐, 그대들의 신의 뜻은 아닐 것임을 그대들은 또한 잘 알고 있으리라. 매 순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나의 스승 무재無在 선사께서 이 몽둥이를 내리고 내게 말씀하시길 주인을 섬기는 자들을 때려 내쫓으라 하셨으되 오늘 그것이 헛됨을 알았도다.


주인을 섬기는 그대들은 애초에 매 순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어찌 이 몽둥이로 다시 존재하는 자가 될 수 있겠는가. 스승의 죽비를 던져 버리지 못한 나의 어리석음을 이제야 알았으니 내 어찌 이곳에 계속 머물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말을 마친 편재 스님이 은빛 몽둥이의 한 쪽 끝을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날로 내려치자 은빛 몽둥이는 힘없이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곧이어 편재 스님은 왼손에 들린 은빛 몽둥이의 나머지 조각마저 다른 하나가 굴러 떨어진 곳으로 툭 던져버렸는데 알루미늄 배트를 갈아서 만들었다던 그 몽둥이는 속이 텅 비어있는 얇은 종이를 한 번 감아 은빛 색깔을 입힌 것임이 드러났다.


“견성아, 이미 오래 전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고서도 나를 염려하여 곁에 머물러 주어 고맙구나. 이제 너의 뜻을 펼치도록 해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은빛 몽둥이를 두 동강이 내버린 편재 스님은 개를 향해 깊은 합장을 한 뒤 뚜벅뚜벅 걸음을 내디뎌 사람들이 양쪽으로 물러나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길을 걸어 산으로 향해 나아갔다. 무엇에도 얽매임 없이 자유로운 그의 몸짓과 당당하면서도 날렵한 그의 걸음걸이를 오랫동안 지켜보며 사람들은 예기치 않은 상황 전개에 다만 어안이 벙벙할 뿐 그 누구도 소리를 내거나 입을 열어 말을 하지 못했다. 편재 스님의 마지막 뒷모습이 어둠에 녹아 들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사람들의 관심은 남아 있는 개에게로 향했다. 편재 스님이 떠나기 직전에 개에게 남긴 말과 개를 대하는 행동은 필경 사람이 개에게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휘이잉.’ 가을 저녁이 무르익고 있음을 알리는 스산한 바람 한 조각이 경내에 들어왔다가 떠나갔을 무렵, 잠자코 있던 개가 편재 스님이 사라진 곳을 향하여 뒷다리로 버티고 서서 두 앞발을 모아 깊이 허리를 숙여 합장하였다.


합장을 마치고 나자 편재 스님이 견성이라고 부른 개는 앞으로 몇 걸음을 내디뎌 바닥에 뒹굴고 있는 목어를 집어 든 다음 땅에다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구무언심무상口無言心無想


견성犬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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