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실존이라는 숙명

by 오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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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현대철학의 문을 연 철학자로 평가 받는다. 하이데거 철학의 어떤 특징이 그를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의 반열에 올린 것일까?


후설의 철학은 의식의 현상학, 하이데거의 철학은 존재의 현상학으로 규정된다고 했다. 그의 철학이 존재에 대한 탐구에 집중되며, 그 탐구의 방법론으로 현상학을 차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존재를 구분한다. 존재자란 대상이다. 인간을 포함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식물과 사물이다. 곧 개별적으로 '있는' 만물이다. 존재란 각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있게 하는' 근거다. 쉽게 말하면 존재자의 본질과 같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존재자와 존재를 구분한 까닭은 무엇일까? 하이데거는 기존의 형이상학이 양자를 구분하지 않은 채 사용했다고 보았다. 존재자를 존재로 잘못 불렀다는 얘기다. 그리하여 그는 기존의 형이상학의 오류를 바로잡고 존재의 의미를 밝히고자 했다. 하이데거나 근대철학을 '존재 망각의 역사'라고 부른 이유다.


인간이 사물과 같은 다른 존재자들과 차별화되는 이유는 인간이라는 존재자만이 존재의 의미를 묻기 때문이다. 질문하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반대로 존재의 의미에 대해 묻는 인간에게는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이데거는 다른 존재자들과 변별되는 인간의 위상에 '현존재'라는 이름을 붙인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이라는 단어는 오염된 것이어서 그는 수많은 자신만의 용어를 창조하여 썼다.


현존재는 '실존'한다. 그래서 그는 현존재의 본질이 실존에 있다고 말했다. 즉, 인간이란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묻도록 숙명 지워진 존재자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라는 용어도 썼다. 인간을 보편적, 추상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존재를 의미를 규명하는데 실패했던 기존의 형이상학과 달리 늘 구체적 상황에 직면해 있는 인간을 해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즉, 하이데거의 입장이란 '인간은 이성적 존재다.' 따위의 정의는 인간 존재의 의미가 아니며, '인간은 불안한 존재다.', '인간은 걱정하는 존재다.' 류의 정의가 인간의 실존에 가깝다는 것이다.


현존재와 세계-내-존재라는 용어는 인간의 '피투성(被投性)'을 내재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계에 던져졌다는 것이다. 던져졌다는 사실은 모든 존재자에게 발생한 현상이지만 그 이유에 대해 질문하는 존재자는 오직 인간뿐이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에게 '불안'을 선물했다.


시간성에 지배되는 인간의 삶은 불안을 동반한다. 그것은 죽음으로 귀결되는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자가 맞닥뜨리는 감정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불안이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준다고 생각했다. 먹고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일했다고 자부하던 사람도 어느 날 직장으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거나 하던 사업이 망하게 되면 인생의 허무함에 사로잡히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삶 자체가 무너지는 듯한 극도의 무기력함을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하이데거는 바로 그런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불안이라는 감정이야말로 삶의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되는 기회로 보았다. 그리하여 하이데거는 불안을 '근본기분'이라고 불렀다. 불안이라는 근본기분을 맛본 적 없는 인간에게 삶이란 아무런 변화 없는 권태로 느껴질 것이다. 그런 인간들조차 죽음 앞에서는 불안을 경험하기 마련이다. 즉, 죽음이란 인간에게 있어 불안의 궁극인 셈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죽음으로의 선구'를 얘기한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 보라는 것이다. 그때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비본래적 삶'에서 벗어나 '본래적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입에 발린 핑계를 내세우면서 타자의 시선에 얽매인 채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삶의 가치와 동떨어진 세속적 가치로 시간을 채우는 삶이 비본래적이라면, 자신의 실존에 진실한 삶은 본래적이다. 만일 어느 날 갑자기 시한부 판정을 받는 사람이라면 '죽는 날까지 직장 생활이나 열심히 하다 가야지.'라는 결단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인생이란 과연 무엇인가?',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남은 동안이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의미에 부합하는 경이로운 사건들로 시간을 채우고 싶을 것이다. 이것이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본래적 삶에 대한 열망이지만 평소에는 억압되어 있다가 특정 계기를 만나 현실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중에서 가장 극적인 죽음을 향해 의식을 미리 달려가게 해봄으로써 인간은 자기 존재의 참 의미를 깨닫고 본래적 삶으로 인생의 궤도를 수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자기 존재를 향해 열려 있는 가능성의 존재자다. 근대철학은 이성을 가진 인간을 주체로 삼고 인간 외의 대상을 객체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사물은 물론 '나' 외의 타자도 모조리 수단화되고 말았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존재를 구분함으로써 인간이 어떤 특성을 가진 존재자인지 밝혔다. 그에 의해 선명해진 인간이라는 개별적 존재자의 지평은 인간이 공통의 본질을 공유한 통합적 존재로 사유될 가능성을 열었다.


이런 사유를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의 인식 지평과 다른 지평에 서 있는 사람들을 공산전체주의 추종 세력이나 반국가세력이라고 몰아붙이는 몰상식한 발언을 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존재자가 구사하는 언어는 그의 존재 및 세계에 대한 인식 수준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정작 그는 반유대주의자였고 오랜 기간 나치에 부역했으며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 재임 시절 학생들에게 나치에 가입할 것을 종용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존재자에서 존재로 인간의 지평을 확장한 그는 좁은 존재자의 지평에 공고하게 머물렀던 것이다. 후설은 존재의 현상학이 우생학으로 빠질 위험성을 보았던 것일까?


그의 철학은 사르트르를 통해 실존주의로 이어진다. '행동하는 지성'의 길을 걸었던 사르트르에 비해 하이데거의 삶은 초라해 보인다. 그의 철학적 성취는 그의 나치 부역을 정당화해 주지 않는다. 죽음을 향해 강제로 달려가게 된 유대인들의 비본래적 삶 앞에서 그래도 그의 철학은 위대하다는 말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heidegger2.jpg


壬乙癸己

午巳酉丑


甲乙丙丁戊己庚辛壬

子丑寅卯辰巳午未申 (6, 1889)


하이데거의 사주 구조다.



壬乙

巳酉丑


사유축 삼합을 이룬 유금 왕지 편관을 살인상생으로 수용한다.


壬乙癸己


사오(미) 식상 방합을 이룬 왕지 오화 식신으로 유금을 거부해 보기도 하지만,


壬乙癸己

巳酉


오화는 축토의 현실 논리에 입묘하고,


壬乙癸己

巳酉丑


甲乙丙丁戊己庚辛壬

子丑寅卯辰午未申


대운도 사유축 편관국을 강화하니 나치에 협력했다.


癸己

午巳酉


축토에서 재극인되어 드러난 계수 편인이 관성의 생을 받으니 대학에서 많은 공부를 하게 되고, 재극인 관인상생으로 엄청난 사유력과 현실 분석 능력을 갖추게 된다.


癸己

午巳酉丑


甲乙丙丁戊己庚辛壬

子丑寅卯辰巳午未申


재극인의 천재성을 썼던 젊은 시절을 보내고, 시를 예술의 본질로 삼았던 그의 말년을 시간 임수 정인이 잘 설명해 준다.



시를 통해 그는 과거의 자신이 갇혀 있던 세계 속 인간의 광기를 직시하고 반성했을까? 철학은 개념을 창조하지만 시는 개념을 초월한다. 탁월한 철학적 개념과 경이로운 시적 초월이 인간의 오류에 대한 방패가 될 수는 없다. 치욕의 일제 강점기를 겪고도 역사 청산에 실패한 우리이기에 더욱 그렇다. 어떤 예술적, 문학적, 철학적 성취도 친일 행적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인간의 한계, 시대의 한계라는 말 뒤에 숨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자기 재능의 성과물을 인정 받으려 하는 모든 시도는 구차하다. 그런 철학과 예술 없이도 인간은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정치 체제와 행위 역시 정당화될 수 없다. 인간을 수단화하는 정치적 시도를 용인하는 순간, 인간이라는 존재는 노예로 전락한다. 하이데거는 스스로 드높인 인간 존재를 노예로 추락시켰다. 인간이라는 존재자에게는 여전히 노예라는 지평의 문이 닫히지 않았다. 지구 위에서 운영되는 국가라는 시스템도, 인간이 앞다투어 개발 경쟁에 몰두하고 있는 인공지능도 그 사실과 가능성을 증거한다.


어쩌면 그것은 에너지의 노예라는 인간의 태생적 한계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소수의 인간은 그 한계를 통찰하고 그 굴레에서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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