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자유를 선고 받은 인간

by 오종호

사르트르(1905~1980)는 존재(하이데거 관점으로는 존재자)를 즉자존재와 대자존재로 구분했다. 의식이 없는 동물이나 사물은 즉자존재다. 외부의 존재와 현상, 그리고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고 그것을 지향하는 의식을 가진 인간은 대자존재다.


즉자존재는 자기 자신으로 꽉 차 있지만 대자존재는 비어 있다. 비어 있기에 변화의 가능성이 생긴다. 사르트르에게 이 비어 있음은 곧 '무(無)'다. 의식 주체인 인간과 대상 사이에 '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정시 퇴근한 당신은 지금 친구들과의 연말 모임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지하철 역사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다. 당신은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유튜브 매불쇼를 들으며 속으로 킥킥거리는 중이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린 당신 눈앞에 대형 건물 외벽의 미디어 파사드가 현란하게 펼쳐지고 있다. 당신은 그것에 시선을 빼앗긴다. 마침 그때 사람들이 오매불망 기다려 왔던 첫눈이 내린다. 사람들이 환호한다. 당신은 하늘을 올려다 본다. 함박눈이다. 당신은 수년간 사귀었다가 몇 개월 전에 헤어진 옛 연인과의 추억에 잠긴다.


약속 장소를 향해 다시 걸음을 옮기던 당신은 문득 생각한다. 미디어 파사드를 지켜보는 동안 매불쇼의 출연진이 왜 웃었는지, 옛 연인과의 첫눈 데이트를 생각하는 동안 매불쇼와 미디어 파사드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게 인간의 의식은 새로운 대상을 향해 이동하고(사르트르는 이를 '초월'이라고 불렀다.), 의식이 이동할 때마다 기존의 대상을 향했던 의식은 '무화(無化)'된다. 일종의 리셋(reset)인 셈이다. 당신이 등에 매고 있는 백팩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갖다 대고, 미디어 파사드를 보여 주며, 첫눈을 맞게 해줘도 백팩은 아무 반응을 하지 않는다. 백팩은 '무'가 없이 자기 자신으로 꽉 차 있어 의식이 없는 즉자존재이기 때문이다.


의식이 있다는 것은 곧 비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르트르에게 인간은 틈이 있는 존재다. 비어 있는 틈을 통해서 의식은 대상들을 지향하고 초월한다. '무'가 대자존재의 존재 양식인 이유는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을 때 더욱 분명해진다. 직장인, 학자, 사업가, 자영업자, 주부, 부모, 가장, 학생, 취업준비생 등 당신이 당신을 어떻게 소개하든 그것이 당신의 본질이 아님을 당신은 잘 알고 있다. 당신의 본질은 당신 자신에 대한 당신의 소개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인간을 '무엇이 아닌 존재'라고 부른다. 이 지점에서 인간에게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가능성이 열린다. 지금 '무엇인 존재'를 거부하고 '무엇이 아닌 존재'로서 '무엇이 되기 위해' 기투(企投)'할 수 있는 가능성 말이다.


'현존재의 본질은 실존에 있다.'는 하이데거의 말은 이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것으로 진화한다. 인간은 존재 이유와 목적 없이 '피투된' 상태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묻는 존재자라는 의미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인간은 '자유를 선고 받은' 존재라는 것이 사르트르의 입장이다.


사르트르는 모든 종류의 결정론을 거부한다. 그에게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다. 하지만 자유로운 인간은 매번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고 그것은 불안의 감정을 동반한다. 하이데거가 근본기분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 불안이다. 사르트르는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부조리한 일상에 순응한 채 살아가는 것을 '자기기만'이라고 불렀다. 그는 사람들이 자유로운 존재로서 불안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기투'할 것을 요구했다. 즉 사르트르에게 실존이란 불안으로부터 도피하지 않는 주체적인 태도인 것이다.


사르트르는 선택의 자유에 수반되는 책임과 그것의 사회적 양태인 '앙가주망'을 강조했다. 특히 지식인의 공동체의 가치를 위한 주체적 선택과 사회 참여를 통해 부조리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그의 실존주의는 곧 휴머니즘이었고 지독한 낙관주의였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레지스탕스로 참여하여 독일군에게 맞섰고, 알제리 독립을 옹호했으며, 베트남 전쟁 시 반전 운동을 펼치는 등 사르트르의 일생은 앙가주망의 실천 그 자체였다.


그 과정에서 그가 수많은 타자들과의 충돌을 경험했음이 분명하다. '나'의 자유를 제약하는 타자의 존재를 그는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마치 권력처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자주 그것에 굴복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사르트르의 타자에 대한 인식에 잘 투영되어 있다. 달리 말하면 타자는 '나'를 즉자존재로 만드는 셈이다. 그는 대자존재인 인간이 즉자화 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에겐 사랑조차도 언제까지나 상대를 대자존재로 남게 할 때 의미 있는 것이었다. 보부아르와의 계약 로맨스는 서로가 서로에게 대자존재로 남도록 하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두 사람의 인식을 잘 보여 준다.


사르트르의 낙관적 실존주의는 구조주의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회 구조와 시대 상황에 지대한 영향을 받으며 억압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노라면 아무래도 구조주의의 손을 들어 주게 된다. 그러나 인간에게 억압으로 작용하는 구조의 변화와 해체가 오직 사회 구성원들의 참여로 가능해진다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 인간의 주체성을 신뢰한 사르트르의 철학은 꺼지지 않는 횃불로 남아 우리의 일상을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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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르트르의 '무'를 노자의 용어로 바꾸면 '허(虛)'가 적절하다. 노자에게 '충(沖)'은 도(道)를 작용하게 하는 도의 속성이며(도충이용지), '허'는 만물을 낳고 기르는 천지의 작용력이 다하지 않게 되는(허이불굴) 속성이다. 사르트르의 인간을 대자존재로 만드는 것은 틈 곧 의식의 여백이다. 그 여백 안에서 인간의 의식은 기존의 의식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무화'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내려놓는 노력으로 비우거나 시간과 함께 희석시키는 방식으로 '허화(虛化)'한다.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주체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허화'가 필요하다. 외부 대상에서 대상으로 건너뛰는 인간 의식의 무의식적인 '초월'은 무방비 상태의 인간에게 침투하여 잠재의식을 자극하는 감각 정보의 공격과 같다. 그것은 결코 무화되지 않는다. 우리의 잠재의식 한 구석에 찌꺼기로 남는다. 그것을 의식적으로 걷어내어 인식 체계의 오염과 오작동을 막을 때 우리는 자유로운 주체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허화'에 실패한 수많은 타자들의 비주체적인 선택에 의해 탄생한 기괴한 구조가 위력을 발휘한다. 분명, 타자는 지옥이다.



丁辛壬乙

酉卯午巳


癸甲乙丙丁戊己庚辛

酉戌亥子丑寅卯辰巳 (5, 1905)


사르트르의 사주 구조다.


壬乙

酉卯


오월 편관월에 신금 일간으로 태어났다. 사오(미) 칠살국을 짠 사회에서 태어났으니, 격변의 20세기를 관통한 그의 삶에 걸맞다.


오월 지장간에 병화 정관, 기토 편인, 정화 편관이 있고 다행히 월령이 기토이니 학문으로 명예를 높이는 삶이 가능했다.


丁辛壬乙

卯午


화기를 수렴하기 위해 오중기토 편인 학문에 몰입하고, 묘오파의 지장간 조합에서 기토를 재극인하는 구조다.


辛壬乙

酉卯午巳


방합을 이룬 연월지의 관성이 시간의 편관으로 드러났으니 세계적인 브랜드가 될 운명임을 암시한다.


丁辛

酉卯午巳


재생살로 이어진 오화 칠살국 위에 근 없이 상관이 드러나 있으니 신체가 강건하기 어렵다. 사르트르의 키는 153cm로 알려져 있다.


丁辛壬

酉卯午巳


이 임수를 살리는 것은 오직 신금이니, 강력한 근을 가진 정화 편관의 난관과 난제 앞에서 불굴의 의지를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한 철학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壬乙

卯午


일간이 상관의 정의감, 체제에 대한 저항, 미래를 향해 자신을 던지는 '기투성', 저작 활동에 투신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불굴의 의지 외에 사화라는 합리적 질서에 대한 이상을 사유(축) 삼합으로 공유하는 유금 비견이 있었던 덕분이다.


酉卯午巳


癸甲乙丙丁戊己庚辛

酉戌亥子丑寅卯


무인성 사주가 진토 정인을 만나 공부하고 지장간에서 대운 천간에 드러나니 살인상생 상관패인의 조합을 이룬다. 학문과 사상, 집필 활동으로 명성과 인기를 얻기 시작하는 것이다.


丁辛壬乙

酉卯午巳


癸甲乙丙丁戊己庚辛

酉戌亥子丑寅卯辰巳


이후 명예가 더욱 드높아지며, 임수 상관의 근이 생겨 상관적 '앙가주망'에 더욱 힘을 쏟는다.


丁辛壬乙

酉卯午巳


癸甲乙丙丁戊己庚辛

酉戌亥子丑寅卯辰巳


병자대운 갑진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했다. 진토 정인이 사화와 진사합하고 묘진합, 진유합하니 큰 명예를 얻는 운이요, 진토 정인에서 갑목 정재가 드러나 천간에서 재생관하니 부와 명예를 얻는 운이다.


하지만 자진합하여 근이 강해진 임수 상관으로 병화 정관은 상관견관하니 수상을 거부한 것이다. 멋진 트르형.


丁辛壬乙

酉卯午巳


癸甲乙丙丁戊己庚辛

酉戌亥子丑寅卯辰巳


을해대운 계축년, 정화가 해(자)축의 강한 근을 가진 계수에 충 당하여 축토에 입묘하니 시력을 잃고 실명했다. 오행의 작용력은 인간의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다.


위의 사진에서 사르트르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사오합에서 정화만 천간에 드러나고 한쪽은 임수가 위치해 있는 데서 이런 신체적 모습도 발현되는 것이다. 정화가 드러나지 않았다면 문제가 없다. 사주를 구성하는 오행 조합의 오묘함은 명리학을 알지 못하는 이에게는 아무런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깨달은 만큼 느낀다.


丁辛壬乙

酉卯午巳



상관생재로 일간의 말과 글이 사회에서 시들어가는 을목 편재를 생하니 신체의 열위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인들과의 염문설이 있었다. 을목 편재의 입장에서는 사르트르의 말과 글이 자신들을 살리는 생명수와 같은 것이다. 남자들이여, 몸을 탓하지 말라. 뇌섹남이 될 미래를 향해 기투하라!


丁辛壬乙

酉卯


癸甲乙丙丁戊己庚辛

酉戌亥子丑寅卯辰巳


일지 묘목 편재가 유금과 사중경금을 이루고 있고 사유합하니 일간은 자신의 연인 묘목이 주위의 많은 남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인정한다.


대운에서 식상생재하니 그럼에도 자신의 연인 보부아르에 대한 사랑을 평생 멈추지 않는다.



명리학은 인간이 피투된 존재가 아님을 보여 준다. 인간에게는 이유와 목적이 주어졌다. 그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분명한 것은 하늘이 인간으로 하여금 서로 생하며 더불어 살기를, 더불어 살기에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활인적 삶을 실천하기를 바란다는 사실이다. 노자는 그 이치를 꿰뚫은 사람이다. 사르트르는 서양 철학자답게 동양적 하늘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었으나 누구보다 하늘의 뜻을 굳건히 실천하며 살다간 인물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결핍이 있다. 의식이 비어 있기에 대자존재는 결핍될 수밖에 없다는 철학적 해석보다 사주를 통해 그것을 읽는 명리학적 진단이 선명하다. 사르트르가 발휘한 초인적인 의지와 노력은 생명력의 결핍을 채우고 연장하여 그로 하여금 인간으로서의 주체적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증명하는 삶을 살게 했다. 소수의 인간은 한계를 극복한다. 인간은 의지를 가진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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