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이 인기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자주 분노했다. 높은 영화적 완성도를 얘기하면서도 사람들은 분노했고, 천수를 누리고 사라진 독재자에게 분노했으며, 그가 착복한 돈으로 떵떵거리며 사는 그의 자식들에게 분노했고, 호의호식하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분노했다. 그러나 나는 분노하지 않았다. 분노했던 과거에 반복적으로 분노하는 일은 허망한 일이라. 그것은 시퍼렇게 살아 나라를 겨울로 끌고 들어가고 있는 자들과 그들에 동조하는 하수인들을 향해야 마땅한 일이라.
P는 술자리에서 기분이 좋을 때면 "좋아, 아주 좋아!"라며 독재자 특유의 어투를 흉내 냈다. 고향 선배인 그는 악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현명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는 독재자들을 존경했다. 그는 말했다. "대장부로 태어나 세상을 뒤흔들고 권력을 쟁취하는 영웅이 되는 일이 아무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니지.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이 필수. 거기에 목숨을 거는 도전 정신과 결단력도 필요하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한 거다. 약해 빠진 정치로는 우리가 이 정도로 살 수 있게 되지는 못했을 거야." 독재자를 추종하는 사람답지 않게 그는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를 독단적으로 경영하는 사장에게 불만이 많았다. 나는 더 이상 그를 만나지 않는다.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 권력을 찬탈하고 정당성 없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을 탄압하고 학살한 살인마를 영웅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사람이 아니다. 그저 약육강식의 논리를 신봉하며 언제든 강자가 되어 약자들을 짓밟고 싶은 욕망에 가득 찬 동물에 불과하다. 총칼 대신 법치를 무기로 국민의 삶을 옥죄는 자들은 비겁하다. 법의 잣대를 자신들에게 향하게 하는 대신 법의 손잡이를 잡고 날선 검처럼 휘두르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해 정의가 죽고, 자유와 평등이 질식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다시 위기에 처했다. 그들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자들 역시 사람이 아니다.
'변호인', '1987' 등과 같은 영화가 히트할 때도 사람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나라엔 이런 영화들을 보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 분노의 이유를 갖지 못한 사람들로 인해 나라에는 분노할 일들이 끊임없이 생겨 난다. 나라의 꼴은 참담하고, 나라의 운영을 맡은 사람을 지켜보는 일은 창피스럽다.
분노란 개인의 인간다운 삶을 지키는 숭고한 감정이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개인의 삶도 붕괴된다. 무능한 권력자가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짓에 분노하지 않으면 개인들의 삶이 파탄나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나는 영화를 보고 분노하지 않는다. 그 시절, 산 독재자를 향해 뜨겁게 저항했던 사람들의 분노만이 진짜이기 때문이다. 모든 분노는 현재형이어야 한다. 우리가 분노해야 할 대상은 영화관 밖에 있다. 나는 바란다. 영화의 여운이 사라질 즈음, 사람들이 분노의 감정과도 아무렇지 않게 작별하지 않기를. 그것은 너무도 딱한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