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를 기다린다. 그들의 하염없는 기다림의 대상인 고도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은 50년간 별 의미 없는 대화와 행동을 이어갈 뿐이다. 소년은 고도가 내일 올 것이라는 말을 남길 뿐이며, 포조는 럭키를 괴롭히고 럭키는 고통을 인내할 뿐이다. 그저 그 뿐이다.
세상이 부조리할 때 인생은 그저 그 뿐인 것이 된다.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폭력이어서 인생이 무한 생존 게임으로 전락한다면, 살아 있음이 단지 죽지 못함으로 인해 유지되고 있는 결과일 따름이라면, 그 삶은 여전히 무엇인가를 목적하고 있는 것일까?
만일 누군가의 '죽지 못해서 죽지 않고 있음'의 상태에 대해 온 세상이 무관심하고, 그 누군가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나' 역시 그 중의 하나라면 '나'의 삶에 '인간다운' 목적이 끼어들기 어렵다. 그것은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프리모 레비가 말한 "눈앞의 급박하고 구체적인 문제 앞에서 먼 미래의 중요성은 모두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그에게는 '눈이 오지 않을까? 부려놔야 할 석탄이 있을까? 오늘은 얼마나 먹을 수 있을까?'와 같은 것들이 급박하고 구체적인 문제였다. 그와 동료들은 '이해하려 애쓰지 않고, 미래를 상상하지 않으며, 모든 게 어떻게 끝나게 될지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않는' 지혜를 터득하고 있었다. 질문은 불필요했다.
목적을 상실하고 질문을 멈춘 인간에게 남는 것이 기다림이다. 살아 있음으로 인해 겪어야 할 극한의 고통 앞에서도 죽을 수 있는 자유를 배우지 못한 인간의 목숨이란 쉽게 끊어지지 않는 것이어서, 인간은 기다린다. 고통이 끝나기를, 행운이 찾아오기를, 신이 오기를, 그러므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법칙은 간단하다. 끝나지 않는 고통을 선사하며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믿게 만들면 된다. 그것이 곧 삶의 본질이라고, 행운과 신 따위는 매일 밤 달콤한 잠결에 흔적없이 왔다가는 꿈일 뿐이라고. 인간에게는 육체에 가해지는 감각만을 현실이라고 인식하는 선명한 신경이 있으니, 삶은 본래 고통스러운 것이므로 달게 감내하며 하늘을 바라보지 말고 고개 숙여 땅에 떨어진 것이나 주어 먹고 살라고 세뇌하면 된다. 고개를 빳빳히 치켜드는 자들의 목을 본보기로 가차없이 베어 버리면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기다린다. 세상을 모르는 척, 세상에 관심 없는 척, 이것이 세상이고 인간인 척 시선을 내리고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기다린다.
가혹한 비인간적 현실을 수긍할 수 없는 인간만이 기다림을 거부한다. 그들은 기다림 대신 저항을 선택한다. 저항 정신은 목적을 발굴하고 사람들을 모은다. 이 땅에 모였던 저항자들은 일본이 망하기를, 독재 정권이 무너지기를,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가 되기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은 목숨을 내던져 부조리한 현실과 싸웠다. 그런 현실은 인간에게 마땅한 것이 아니었기에. '이것은 인간이 아니었'기에.
아우슈비츠는 사라졌지만 인간은 저마다의 수용소에 갇혀 있다. 각자의 지옥에서 눈앞의 급박하고 구체적인 문제에 허덕이느라 고개를 들지 않는다. 좋은 날 오겠지, 좋은 날 올 거야, 열심히 살다 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짐짓 덕담을 건넨다. 이것이 인간이라고. 정치하는 놈 다 거기서 거기라고. 힘내자고. 세상은 망해도 '나'는 흥하는, 그날만 오면 된다는 속말을 감춘 채, 기다린다.
고도를 기다리는 동안 내일은 다시 밝았고, 오늘도 고도는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