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不生無祿之人 地不長無名之草
천불생무록지인 지부장무명지초
- 하늘은 복록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다. - <<명심보감>> 성심편(省心篇)
<<논어>>에서는 '부귀재천(富貴在天)-부귀는 하늘이 내린다)'이라고 했고, <<명심보감>>의 바로 다음 대목에서도 ''대부유천 소부유근(大富由天 小富由勤)-큰 부자는 하늘이 내리고, 작은 부자는 부지런함이 만든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고전이란 우리로 하여금 우리 고유의 철학을 세우도록 도와주는 재료입니다. 재료에 휘둘리면 이도저도 아닌 요리가 만들어질 뿐입니다.
녹(祿)은 본래 하늘이 주는 개념입니다. 시(示)는 신을 뜻하고, 녹(彔)에는 선물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이 주는 선물인 것입니다. '나라의 녹을 먹는다'고 할 때의 녹봉이라는 말에는 임금을 지극히 높이려는 의도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이 '무록지인'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하늘이 땅에 사람을 낼 때는 다 먹고 살게끔 해준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다 자기 먹을 것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과 같습니다. 전쟁통에 굶어 죽거나 먹을 것이 없어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들으면 '그 먹을 것 어디에 있냐?'며 원성을 쏟아낼지도 모르겠습니다.
명리학 공부를 통해 제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는 하늘이 정해 놓은 이치를 따릅니다. 규모와 속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입니다. 규모의 차이란, 부자의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은 같은 사주라도 재산의 절대적 액수만 다를 뿐 기본적으로 물질적 성취를 이루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의 돈이 모이는 주식 시장에서 부를 일군 워렛 버핏과 우리나라 시골에서 돈놀이를 하는 사람의 부의 크기가 동일할 수는 없겠지요.
속도의 차이는 재물적 성취를 거두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태어나자마자 자기 몫의 큰 부가 예비되어 있고, 누군가는 20대에 세계적 거부의 반열에 오르기도 하며, 또 누군가는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빈한한 삶을 살다가 노년에 이르러 풍요를 누리게 되기도 합니다. 속도의 차이는 난이도의 차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긴 시련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부자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시련에 굴복해서는 부를 얻을 수 없겠지요. 시련은 하늘이 낸 일종의 시험과 같기 때문입니다. 인간 세상에 필요한 부자는 궁핍의 고통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부자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의 부는 좀 더 따뜻하게 쓰일 가능성을 갖습니다.
어느 인간도 하늘의 섭리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운명적 존재자이며, 하늘은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고 선한 목적을 향해 희망을 품고 나아가는 사람에게 길을 열어 줍니다. 이것은 학문적 깨우침과 직접적 체험을 통해 얻은 저만의 깨달음입니다.
근면함이 부의 결과를 낳는 원인이라면 우리 시대에 가난한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어야 마땅하지요. 그러나 인간이 만든 부의 시스템은 부로부터 소외되는 다수를 양산합니다. 부는 소수에게 집중되어 대물림되는 속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름을 가졌으나 널리 불릴 일 없었던 수많은 무명씨들은 앞으로 수입을 얻을 일자리마저 상실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들판의 풀처럼 흙을 파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선한 목적이란 공익적 가치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같이 먹고 사는 것만큼 위대한 그것은 없습니다. 선한 사회를 만들어야 선한 목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도덕경>> 77장에 '천지도 손유여이보부족(天之道 損有餘而補不足)-하늘의 도는 남는 곳에서 덜어 부족한 곳에 더해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을 대신해 하늘의 도를 실천하는 부자, 그 사람이 하늘이 내린 부자입니다. 여러분, 그런 부자가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