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최고봉 산들을 연이어 품어 인도와 중국 사이를 가로막고 서 있는 히말라야 산맥(the Himalayas). 히말라야는 '눈'을 뜻하는 히마(hima)와 '곳간'이라는 의미의 알라야(ālaya)의 합성어다. 곧 '눈을 간직한 곳'이다.
산스크리트어 '알라야'의 음역어가 '아뢰야(阿賴耶)'다.
불교의 정수가 연기(緣起)라면 이것을 대승불교적으로 전개한 것이 공(空)과 유식(唯識)이다. 유식이란 마음의 본체인 식(識)을 떠나서는 어떠한 실재(實在)도 없다는 것이다. 유식 사상에 따르면 우리가 외부에 실재한다고 믿는 사물이나 현상 등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하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그저 마음이 지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유식은 우리의 마음이 안/이/비/설/신/의/말나/아뢰야의 8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아뢰야식은 가장 근원적인 마음이다. 우리의 몸과 말, 생각은 각각 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意業) 세 가지 업(카르마)을 짓는다. 모든 업은 저마다의 종자를 생성하고 그것들은 빠짐없이 아뢰야식에 저장, 보존된다. 선업은 선업대로 악업은 악업대로 씨앗으로 심어져 열매로 이어진다.
그대가 창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 문득 전 연인과의 추억이 떠올라 슬픔에 잠기는 상황을 예로 들어보자. 비는 공하다. 비는 실재하지 않는다. 연기에 의해 지금 그곳에 있을 뿐이다. 비의 이데아 같은 것은 없다. 비는 영원히 내리지 않는다. 조건이 사라지면 비도 그치고 거리를 적신 물기는 자취를 감춘다. 그대의 아뢰야식에 보존되어 있던 종자가 소환되어 그대는 슬프다. 슬픔도 비처럼 찰나의 순간에 나타났다. 친구에게 전화라도 오면 슬픔은 이내 소멸될 것이다. 물론 통화가 끝나면 다시 슬픔이 이어질 수 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슬픔은 이전의 슬픔과 다르다. 마치 그대의 몸에 들어 있는 세포들이 3개월 전의 그것들과 같지 않듯이. 연인과 함께한 시간 동안 그대가 뿌린 씨앗의 성격에 따라 그것은 지금처럼 슬픔의 감정으로도, 그리움으로도, 분노로도 표출될 수 있다. 아뢰야식이 곧 윤회다. 나가르주나는 말했다. "무상한 현실을 바르게 아는 것이 열반이라고." 윤회가 열반이고 열반이 윤회다.
석가모니 부처의 삶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최고의 격려다. 그 덕분에 나의 가능성 역시 늘 열려 있다. 더 넓은 가슴을 가진 인간으로 나아가기 위해 좁고 작은 나를 끊임없이 죽일 수 있는 용기를 내고, 나의 해탈을 향해 정진할 힘을 얻는다.
부처는 오지 않았다. 다만 부처로 거듭났을 뿐. 나이 60, 70을 먹어도 공감과 동정을 갈구하는 덜떨어진 애가 있고, 십대에도 이미 성인과 같은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어른이 있다. 우리가 마음의 곳간 안에 채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저 새하얀 설산처럼 나는 날마다 내 안의 더러움을 내려보낼 따름이다. 아래로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