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람들
즉위한 부차는 오자서가 아니라 백비를 태재(최고 재상)로 임명하고 월나라 정벌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대군을 일으킨 부차.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는 오나라 군사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밀린 월왕 구천은 겨우 5천의 병사와 함께 산속으로 들어가 짱박힌다. 그리고 사신을 보내 백비에게 뇌물을 바치고 강화를 제의한다. "오왕이시여, 월나라를 다스려 주소서. 소인과 소인의 처는 기꺼이 노비가 되겠나이다."
오자서는 구천의 심중을 꿰뚫어보았다. 부차가 선왕의 원수를 갚겠다는 맹세를 잊지 않기 위해 장작더미에서 잠을 잤듯이, 구천 역시 일시적인 모욕을 감내하고 때를 기다리며 힘을 기를 수 있는 강한 인물임을 파악한 것이다. 그는 충심으로 간언한다. "지금 구천을 없애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시게 될 것이옵니다. 그는 어떠한 고난도 인내할 수 있는 자이옵니다."
그러나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는다. 부차는 언제나 백비의 손을 들어 준다. 대부분의 권력자는 너무 똑똑하고 바른 신하를 좋아하지 않는다. 부차는 나와바리 접수하고 대범한 큰 형님답게 가오 좀 잡겠다는데 이 마음을 몰라 주는 오자서가 짜증나는 거다. 발 아래 엎드려 질질 짜고 있는 놈을 자꾸 자기와 동급으로 치켜세우는 것과 같으니 기분이 잡칠 수밖에. 이제 복수는 끝났고 오늘부터 기분 좋은 잠자리를 위해 템퍼 매트리스까지 주문해 놨는데, "복수 아직 안 끝났으니 주문 취소 하세욧!"이라고 떠드는 셈이니 빈정이 상하는 거다. 오자서는 정치를 몰랐다.
새로 산 매트리스의 쿠션감을 만끽하며 5년을 보낸 부차. 제나라 경공이 죽었다는 뉴스를 보고 벌떡 일어나 외친다. "다시 전쟁이닷!"
사리 분별 능력이 모자라는 부차에게 달려온 오자서. 충심을 다해 굵직한 목소리로 제나라 침공을 만류한다.
"전하, 지금은 제나라를 칠 때가 아니옵니다. 구천을 죽이고 월나라를 멸하십시오. 구천은 수모를 견디며 사람들을 모으고 있사옵니다."
실제로 그러했다. 부차가 '와신'했다면 구천은 '상담'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기고만장한 부차에게 이미 구천은 안중에도 없는 존재. 부차는 오자서를 내치고 제나라로 출병하여 신나게 두들겨 패고 돌아온다. 이후 오자서의 면상을 보면 더욱 밥맛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
사는 게 무료했는지 몇 년 후 다시 제나라를 치려는 부차를 또 막아서는 오자서. '하, 이 자식. 고무줄을 삶아 먹었나 질기다 질겨.' 부차는 오자서를 외면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동안 구천은 정치적 식견이 탁월한 자공(공자의 제자)의 계책에 따라 수차례 뇌물을 바치며 백비를 포섭해 두었고, 그에 더해 오나라의 제나라 정벌에 힘을 보태겠다고 군사를 데리고 와서 머리를 조아리기까지 하니 백비의 입에서는 월나라와 구천에 대한 칭찬만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구천을 개무시한 부차는 꼴 보기 싫은 오자서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낸다. 오나라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 오자서.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가 제나라의 포목이라는 자에게 맡기고 돌아온다. 이를 알게 된 백비. 이 기회에 오자서를 제거하고 불쾌 지수를 낮추기로 결심한다.
"전하, 오자서는 자신의 의견이 번번히 받아 들여지지 않자 오랫동안 불만을 품어 왔나이다. 이번에 제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자신의 아들을 포목이라는 자에게 떠맡기고 왔다 하니, 이는 필시 제나라와 결탁하고 우리 오나라를 배신하려는 뜻임이 분명하옵니다. 반역자 오자서를 참수하시어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소서."
오자서의 얼굴을 떠올리자 속에서 신물이 올라옴을 느낀 부차는 오자서에게 잘 벼려진 검 한 자루를 내린다. 검을 받은 오자서. 서늘한 칼날에 비친 파란 하늘, 그 위를 유유히 흐르는 뭉게 구름, 그리고 햇살 한 조각. 오자서는 담담히 유언을 남긴다.
"거 죽기 딱 좋은 날씨네. 내 무덤가에 가래나무를 심어 그것이 자라면 부차의 관으로 사용하도록 하라. 내 눈알을 도려내어 도성 동문 위에 매달아 오나라가 월나라에 멸망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하라."
전화로 보고 받은 부차는 격노하면서 오자서의 시신을 자루에 담아 강물에 던져 물고기 밥이 되게 하라고 명령했다. B.C. 484년의 일이다.
11년 후, 월나라 구천은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부차를 죽인다. 간신 백비 역시 처형하여 부차의 길동무로 삼아 준다.
'소의를 버리고 큰 치욕을 씻어 후세에 명성을 남긴 비장한 대장부의 삶'이었다고 사마천은 오자서의 인생을 평가한다. 그가 복수를 끝내고 세상에서 멀어졌다면 나도 기꺼이 사마천의 의견에 동조해 주겠다. 하지만 무능한 권력 옆에 머무르며 그가 추구했던 바가 무엇이었는지는 선명하지 않다. 그것이 그의 한계다.
그의 일생에서 우리가 길어 올려야 할 교훈은 따로 있다. 복수라는 목표를 품었다면 불굴의 의지로 인내할 것. 때를 기다리며 힘을 기를 것. 이것이 첫 번째다.
무능하고 비열한 자들이 휘두르는 권력은 잔인하다. 그들에게 대의란 없다. 불의한 권력을 응징하여 나라를 바로 세우고 국민을 도탄에서 구해 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수모를 견디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반드시 권력을 쟁취해 무도한 자들을 척결하고 적폐를 일소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억울한 역사를 청산하고 억울한 목숨들을 위로하는 당당한 민주 권력의 자비 없는 복수가 절실하다는 것, 이것이 두 번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