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람들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진나라군을 두려워한 조나라와 한나라는 소대에게 진의 재상 범저에게 유세하기를 부탁한다. 소대는 소진의 사후 종횡가로 활동한 그의 동생이다.
예물을 두둑하게 바치고 나서 소대는 은근히 범저의 심기를 건드린다.
"조나라가 망한다면 진나라 왕은 제(帝)가 될 것이고 백기는 삼공의 지위에 오르겠지요. 공께서는 백기 아래에서 일하는 수모를 견딜 수 있으시겠습니까? 조나라 땅 일부를 받는 것으로 화친하시어 백기가 공을 세우지 못하도록 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뇌물도 챙겼겠다 백기를 견제할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까지 건져 기분이 좋아진 범저는 소양왕을 찾아가 건의한다.
"전하, 장기간의 전투로 우리 군사들의 피로가 누적되었사옵니다. 피로엔 디오니소스! 한 박스씩을 하사하시고 못 이기시는 척 한나라와 조나라의 화친책을 수용하시면서 실리를 챙기심이 옳은 줄 아뢰오."
범저로 인해 진나라 군대가 철군하게 되자 속이 지나치게 부글거렸는지 백기는 병이 나고 말았다. 자양강장제 효과가 좋았는지 병사들이 기력을 회복하자 소양왕은 근질거리던 손가락을 쳐들어 다시 조나라 침공을 명한다. 몸이 아픈 백기를 대신해 왕릉이라는 자에게 지휘권을 주었으나 그가 아까운 병사들의 목숨만 희생시키며 "나는 지휘한 게 아니라 지도한 것뿐이다"라는 헛소리만 늘어놓자 소양왕은 백기를 호출한다.
"전하, 조나라 한단 땅은 점령하기 쉽지 않습니다. 조나라가 안에서 대항하고 제후국들이 밖에서 호응한다면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은 아군은 패하고 말 것입니다."
백기가 완강히 사양하자 소양왕이 범저를 시켜 설득하게 했으나 백기는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왕흘이라는 자로 왕릉을 교체하여 가을에 시작한 전쟁을 다음해 여름까지 이어갔지만 결국 대패하고 말았다. 이때 백기가 아무 생각없이 툭 내뱉은 말이 화근이 된다.
"내 말 안 듣더니 나라 꼬라지 참."
정보 요원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소양왕이 격노하여 백기에게 전선으로 달려가 지위권을 이양 받으라고 명령했지만 이미 심사가 꼬인 백기는 콜록거리며 자리에 누울 뿐이었다. 드디어 인내의 한계에 도달한 소양왕은 백기의 지위를 박탈하여 일반 사병으로 강등시킨 뒤 먼 시골로 쫒아 버리라고 명한다. 하지만 실제로 몸이 아팠던 백기는 즉시 떠나지 못하고 몸이 회복되기를 기다린다.
국경에서 다급히 전해지는 연전연패 소식에 속이 쓰렸던 소양왕은 백기가 아직 함양 땅에 머물러 있다는 말을 듣고 열이 뻗쳐 어명을 내린다.
"야, 뒈지게 맞고 갈래, 가면서 맞을래? 당장 안 꺼져?"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도성 밖을 나가 유배지로 향하던 백기의 귀에 "어명이오!" 소리가 들린다. 자신에게 쌓인 게 많았던 소양왕이 내린 검을 마주한 백기는 탄식하며 자결한다.
"장평 전투에서 투항한 조나라 병사 수십만을 생매장했으니 이것만으로도 나는 죽어 마땅하구나."
죽고 죽이는 전쟁판에도 인간의 도리는 있는 법. 포로들을 잔혹하게 죽인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떠난 백기에게는 그래도 양심이 남아 있었다. 자국민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도 죽을 때까지 반성하지 않았던 독재자들의 후예들이 쥐약 먹은 들쥐들처럼 날뛰는 묘지 위로 오늘도 태양은 붉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