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람
왕전은 제후국들을 평정하여 진시황의 중국 통일을 직접적으로 도운 인물이다.
한나라, 조나라, 위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킨 다음 진시황은 초나라를 공격하려 한다. 그는 먼저 젊고 용감한 장수 이신에게 묻는다.
"짐이 초나라를 정벌하려 하는데 어느 정도의 병력이면 되겠소?"
"20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분이 좋아진 진시황. 이번에는 백전노장 왕전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60만이 되지 않으면 어렵다고 봅니다, 폐하."
"이제 왕 장군도 늙었나 보오."
진시황의 명을 받은 이신은 몽염과 함께 초나라로 진격했으나 대패하고 돌아온다. 이에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진시황은 병을 핑계로 고향에 내려가 있던 왕전을 직접 찾아가 간곡히 말한다.
"짐의 생각이 짧았소. 지금 초나라 군대가 진격해 오고 있으니 장군이 나아가 막아 주시오."
하지만 한 번 빈정이 상한 왕전이 튕긴다.
"폐하, 신은 늙고 병들어 정신마저 혼미합니다. 부디 다른 유능한 장수에게 소임을 맡기소서."
'이 놈 봐라.' 표정이 굳어진 진시황. 이번에는 목소리에 단호함을 담아 무겁게 말한다.
"짐이 이미 결정했으니, 장군은 다시 사양하지 마시오."
'사양하면 확 묻어 버린다'는 엄포임을 모르지 않는 왕전. 하지만 역시 산전수전을 겪은 노장답게 승리를 위한 조건을 갖추기를 잊지 않는다.
"폐하께서 신을 굳이 쓰시겠다면 60만의 군사를 내어 주십시오."
"장군의 뜻대로 하겠소."
60만의 대병력과 함께 만반의 출정 준비를 마친 왕전. 출정 보고 자리에서 뚱딴지 같은 요청을 한다.
"폐하, 신이 승전을 이끌고 돌아오면 비옥한 논밭과 연못이 딸린 넓은 가옥을 선물로 내어 주실 것을 약조해 주시옵소서."
'이 자식 뭐지? 확 묻어 버릴까?' 분노 게이지 상승을 진정시키며 진시황이 말한다.
"장군은 어서 출정하여 초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에 공을 세우라. 어찌 훗날 빈곤해질 것을 지금 걱정하는가?"
"폐하, 신은 갑옷을 입고 여러 번 공적을 세웠으나 제후로 봉해지지 못했습니다. 폐하께서 신으로 하여금 자손들에게 남길 것을 마련해 주신다면 더욱 힘을 내어 기필코 성은에 보답하겠나이다."
진시황이 한바탕 크게 웃으며 꼭 그러겠노라고 약조하자 위풍당당하게 출정길에 오른 왕전은 이후에도 다섯 번이나 사람을 보내 자신과의 약속을 꼭 지켜 달라고 간청한다. 왕전의 수하 중 하나가 지나친 처사 아니냐고 묻자 왕전이 속내를 밝힌다.
"폐하는 난폭하고 의심이 많은 분이다. 지금 나라의 군사 대부분을 내게 맡겼는데 과연 심기가 편안하실까? 내게 다른 뜻이 있지 않음을 반복하여 보이지 않는다면 나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으실 것이다."
전선에 도착한 왕전은 진지를 견고히 구축한 후 병사들을 쉬고 먹게 할 뿐 나아가 싸우지 않았다. 여러 차례 싸움을 걸어도 진나라 군사들이 응하지 않자 초나라 군대는 등을 보이며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왕전이 명령을 내리자 원기를 회복하여 사기충천한 진나라 군사들은 초나라 군대를 단숨에 격파했다. 이어 파죽지세로 초나라 도성을 향해 진격한 왕전은 전선에 나온지 1년 만에 초나라 왕을 사로잡고 초나라를 역사 속으로 떠나 보낸다.
사마천은 왕전을 진시황의 비위를 맞추며 구차하게 살다 간 자로 기록해 두었다. 이런 평가는 분명 진나라의 단명과 관련 있을 터. 하지만 우리는 안다. 좋은 말로 선정을 펼치도록 보좌하는 것도 다 리더 나름이라는 사실을. 국가 조직을 쓰레기 하치장처럼 운영하는 권력자의 부름을 받은 쓰레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쓰레기 짓 외엔 없다.
왕전은 진시황의 그릇을 보고 나라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간파하여 그에 맞게 말년의 처세를 한 것 뿐이다. 지금 대통령의 그릇을 보라. 그의 곁에서 나랏일 한다는 자들의 머릿속에 해먹을 결심 말고 다른 것이 들어갈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