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호 글 · ChatGPT 4o 그림
시간은 5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30분이 남아 있었다. 천천히 걸어 약속 장소 앞에서 담배를 한대 피울 수 있는 여유까지 충분했다. 에어컨 바람 탓에 팔뚝에 소름이 돋아나 있었다. 노트북에 닿은 손가락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사람들로 빈자리는 채워져 있었다.
뒤에서 문이 닫히자 햇살보다 먼저 소리가 쏟아졌다. 차와 사람들, 오토바이들이 살아서 윙윙거렸다. 살아있는 것들은 살아있느라 소리지르며 씩씩거렸다. 나무들은 말이 없었다. 나무로 지어진 나이든 고궁도 말을 하지 않았다. 나무는 살았어도 죽은 체 입을 닫고 있었다. 민성은 나무가 늘어선 길을 따라 나무처럼 걸어갔다. 길 건너편 빌딩에 매달린 광고판에서 조금 전 발생했다는 런던 테러 뉴스를 속보로 내보내고 있었다. 지난 달 베를린 오페라 극장에 이어 이번에는 축구장에서 벌어진 대형 테러였다. 사람들은 끝도 없이 서로를 죽여 댔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중년의 사내였다. 그는 에그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말했다. 민성이 답하지 않자 그는 정확히 24시간 후에 시내에서 만날 수 있는가를 물었다. 가능하다고 말하자 사내는 전화를 끊었고 약속 장소의 주소를 메시지로 보내왔다. 에그를 아는 사람이 취해 온 최초의 연락이었다.
남편은 약속이 있어서 좀 늦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은희는 무거운 몸을 추스를 겸 모처럼 일찍 퇴근해서 장을 본 뒤 오붓한 저녁을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남편이나 자신이나 바쁜 사람들이었다. 할 일이 없어서 놀고 먹는 사람 천지인 시대에 남편이나 자신은 선택 받은 사람들이었다.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일은 더욱 많이 주어졌다. 그것이 세상이었다.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게으르게 살면서 남편이나 자신처럼 세상의 부를 창출하는 사람들에게 들러붙어 연명하려는 한심한 자들은 몰염치했다. 지능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능력이 달라서 성과가 다른데 잘나서 일하느라 고생하는 사람들이 벌어서 낸 세금으로 무위도식하려는 자들의 말에는 구역질이 났다. 그 놈의 복지 타령과 인공지능을 없애자는 선동적인 구호에는 신물이 났다. 자신의 출판사만 해도 쓸데없는 무능력자들을 모조리 내보내자 책은 더욱 잘 팔렸다.
거금을 들여 도입한 인공지능 ‘옴’의 능력은 놀라웠다. 옴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저작물을 읽고 기억하고 분석하고 있었다. 원고를 넘겨 주기만 하면 옴은 기획안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 출판 이후의 다운로드 추정치, 예상 손익까지 순식간에 보고했다. 원하는 외국어들로의 번역은 순식간에 완료되었다. 최고 수준의 번역가들조차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숙일 정도로 원어의 뉘앙스까지 완벽하게 살려 냈다. 출판 예정이었던 10권의 책에 대해 직원들이 전망한 수치는 단 하나도 들어맞지 않았다. 옴의 예상은 90%의 적중률을 자랑했다. 해야 할 일은 뻔했다. 직원들을 내보내고 옴에게 일을 시키면 되었다. 사람은 의상 코디네이터겸 비서 한 명으로 충분했다. 자신은 대표와 편집장으로서 옴의 보고서를 읽고 의사 결정만 하면 되었다. 더 많은 원고를 받을 수 있었고 대박 치는 책만 골라서 출간할 수 있었다. 50억원을 들인 도입 금액은 아깝지 않았다. 1년을 무상으로 사용해 본 후 언제든 취소해도 좋다는 조건을 건 개발사의 자신감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무상 사용 기간 경과 후 은희는 기꺼이 50억원을 일시불로 지급했고 매년 1회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도입 비용 10%의 유지보수비를 부담하기로 하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1년 이내에, 20%에 머물고 있는 출판 시장의 점유율을 배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마음 속으로 세워 두고 있었다. 돈 되는 분야로 확장해 가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할 일이 많이 늘었지만 의사 결정권자를 별도로 뽑을 이유는 없었다. 법 때문에 옴에게 집필을 시키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법은 인간의 글만을 출판 대상으로 인정했고, 인공지능의 작품을 인간의 것인 양 속이는 행위를 엄하게 다스렸다. 3년 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소설 『전쟁의 끝』이 인간의 것이 아니라고 판명된 직후 범세계적으로 적용된 규약이었다. 아카시아라는 필명을 쓴 작가는 어느 시상식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떤 연락도 그에게 도달할 수 없었고 따라서 어떤 말도 그로부터 들을 수 없었다. 인공지능 개발사 내부자의 폭로로 아카시아의 정체가 드러났고 사람들은 경악했다. 소설에서 상상한 인류의 비극적 종말의 여운은 확률 높은 현실적 공포로 변화했다.
길거리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희는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개를 좋아했던 민성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진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진짜 사랑을 해야 한다고 민성은 자주 말했다. 민성은 산에 가서 나무를 끌어안고 있기도 했고, 풀밭에 누워 하루 종일 하늘을 쳐다보고 있기도 했다. 은희는 한 순간에 세상 부적응자처럼 변해 버린 민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민성은 전도유망한 과학자였고, 대학 시절부터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천재적 기질의 소유자였다.
어느 날, 민성은 글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은희는 일에 지친 민성이 취미 생활로 습작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위대한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글 쓰는 능력도 적당히 갖출 필요가 있기도 했다. 그러나 민성은 하던 일을 곧바로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혀서 글만 써댔다. 은희는 시도 때도 없이 돈과 거리가 먼 내용의 원고를 들이미는 민성에게 경악했다. 가정 경제의 주체는 어느 순간 은희로 바뀌어 버렸다. 은희는 입술을 깨물며 그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은희는 민성과 침대를 함께 쓰지 않았다.
사람은 낭만적인 생각만으로는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돈과 힘이 없으면 억울하게 짓밟히는 일만 일어났고, 좁고 불편한 집에서 쓰레기 같은 음식을 먹으며 짐승처럼 살아가야 했다. 은희는 도저히 그런 삶을 살 자신이 없었다. 민성의 아이를 갖지 않은 것이 10년 간의 결혼 생활 중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여겨졌다. 피임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세상에 할 일은 많았고 돈은 넘쳤다.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를 바꾸자 성공한 자의 우아하고 품위 있는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삶은 이전의 무력한 삶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천국의 삶이었다. 천국은 강자의 것이었다.
여하튼 옴도 쉬고 자신도 좀 쉬어야 했다. 너무 많은 원고를 처리해서인지 옴은 처음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보고서를 올렸다. 민성의 보잘것없는 원고가 2억 다운로드를 기록할 것이라는 옴의 예측은 얼토당토않았다. 그것도 별도의 다른 작업 없이 텍스트 자체만으로 출간해도 충분히 달성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러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기계는 기계였다. 개발사에 연락해서 AS를 받아야 할 때였다. 1년 전에 5억원이 넘는 금액을 예치하고 지난 달에 수령한, 전 세계에 딱 열 개만 존재한다는 샤넬의 리미티드 에디션 백을 들고 은희는 자신만만한 걸음걸이로 사무실 문을 빠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