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Train)-5

오종호 글 · ChatGPT 4o 그림

by 오종호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 동안 시계가 깜빡이며 4시를 가리켰다. 밖으로 나오자 소리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클럽에서 시간은 멈추어 있었다. 파란 옷의 여자는 손거울에 얼굴을 비추며 립스틱을 바르고 있는 중이었다. 여자는 말끔히 깨어 있는 듯 보였다. 술 기운에 민성의 발은 자주 비틀거렸다.


“이제 그만 나갈까요?”


여자가 고개를 돌려 민성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촉촉히 젖은 입술에서 빨간색 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비는 그쳐 있었다. 바람이 가끔 빗물을 몰아와 공기 중에 흩뿌리고 다녔다. 취기와 졸음 때문에 몽롱했던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자가 팔짱을 꼈다. 마주친 여자의 눈에서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지하 클럽을 벗어난 여자의 몸은 자기만의 체취를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취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도로변에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여자는 민성의 팔을 꼭 껴안았다. 여자는 술집들이 즐비한 골목 안으로 민성을 이끌었다. 그곳에는 술집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술집만큼 많은 최신식 모텔들이 술집과 술집 사이에 끼어 있었다. 걸을 때마다 여자의 향수 냄새가 성욕을 자극했다. 냄새에서 문득, 클럽에서 맡았던 경고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팔에 매달려 있던 여자가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민성의 뒷목이 따끔거렸다. 반사적으로 뒷목에 손을 갖다 댔지만 다리가 풀렸고 정신은 몽롱해졌다. 뿌예지는 시야 안에서 검은색 승합차의 문이 열리고 그 앞에 클럽에서 언뜻 보았던 그림자가 서 있었다.



두통약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어둠 속에 익숙해진 민성의 눈동자에는 생전 처음 보는 장소의 낯선 풍경이 비춰지고 있었다.


DALL·E 2024-06-17 14.10.55 - A blurry, disoriented view as seen through Minseong's eyes from the ground level. The scene includes the side view of a black van with its door open, .png


갤러리에는 이름 모를 사진 작가의 그림이 전시되고 있었다. 관람객은 보이지 않았다. 드넓은 갤러리가 더욱 휑하게 느껴졌다. 사진 속 풍경들은 몽환적이었다. 대부분 안개와 비를 소재로 찍은 사진들이었다. 온통 회색으로 잠든 세상 속에서 깨어 있는 무엇인가를 작가는 찾으려 했던 것 같았다. 안개 자욱한 습지에 홀로 피어 있는 노란 민들레의 사진이 인상적이어서 민성은 그 앞에 한참이나 붙들려 있는 중이었다. 갯벌 위에 군대처럼 도열한 게 무리의 사진 옆에서 노란 꽃잎의 외로움은 바닷바람에 금방이라도 흔들릴 것처럼 선명했다.


“조민성 씨 되십니까?”


짙은 남색 정장에 파란 넥타이를 맨 젊은 남자가 민성에게 말을 걸었다. 민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상의에서 작고 두툼한 봉투 하나를 꺼내 민성에게 건넨 후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사라졌다. 봉투 안에는 자동차 키와 메모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종이의 감촉이었다.


-조민성 씨, 지하 주차장에 차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입력된 목적지로 오십시오.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됩니다. 에기의 말의 이유가 그곳에 있습니다.


DALL·E 2024-06-17 14.21.57 - A vast, empty gallery with no other visitors. The walls are adorned with photographs featuring dreamy, misty landscapes. Most of the photos depict sce.png


이른 오후여서 세상은 한가로웠다. 집을 향해 차가 드문 국도를 시원하게 내달리다가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고 싶은 마음에 은희는 ‘사람과 나무’라는 이름의 카페에 들렀다.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휴(休)의 의미를 가진 카페가 마치 자신의 지금을 위해 지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얀 벽과 파란색 둥근 지붕까지, 유럽풍의 외관도 흡족했다. 집까지는 차로 30분 남짓 걸릴 것이었다. 고속도로를 피해 국도를 택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일상에서 벗어난 자유인으로서의 달콤한 시간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유는 오직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었다. 남의 글이나 대신 써 주면서 연명하는 민성 같은 존재에게 자유는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불쌍한 인간들에게 자유란 평생 획득할 수 없는 헛된 꿈에 불과했다. 실종되는 인간들도 결국 자기를 지켜 낼 돈이 없기 때문일 터였다. 돈은 곧 창이었고 방패였다. 폐부 깊숙이 자유의 공기가 밀려들었다.


DALL·E 2024-06-21 13.15.41 - A serene, picturesque countryside with a large beautiful café named 'People and Trees'. The café has white walls and a blue round roof, styled like Sa.png


카페 안에 들어서자 예쁘장하게 생긴 젊은 여직원이 어서 오라고 인사했다. 카페 안에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 주차장에 있는 포르쉐는 아마 카페 주인의 것인 모양이었다. 그는 분명 자신의 남편처럼 젊고 잘 생겼을 것이라고 은희는 추측했다. 세상은 그런 사람들의 것이었으므로. 돈을 가진 사람들은 늙지 않았고 세련되고 당당했다. ‘사람과 나무’에서, 은희는 오늘이 자신을 위한 완벽한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소음이 허락 없이 침투하지 않는 고요 속에서 커피 향과 음악을 마음껏 음미할 수 있을 것이었다. 피아노 협주곡이 성능 좋은 스피커를 빠져 나와 카페 안을 돌아다녔다.


“카페 모카, 따뜻한 걸로 부탁해요.”


DALL·E 2024-06-21 13.22.09 - Eunhee, wearing a black suit, high heels, and long straight hair, is inside a beautiful café with white walls and a blue round roof. She is seated at .png


호수와 산이 바라다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주문하자 예쁜 종업원은 방긋 웃으며 “네”라고 답하고 떠나갔다. 뒷모습에서 오래 전 자신의 젊은 시절이 느껴졌다. 공부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조아려야 했던 시절의 고통이 밀려오는 듯 했다. 돈으로 젊음을 연장할 수 있고, 원 없이 오래 살 수 있는 시대였다. 종업원의 풋풋함은 부럽지 않았다. 청춘이란 부질없는 낭만에 휩쓸려 시간과 몸을 탕진하는 무모한 시기였다. 인간의 젊음은 슬픈 것이었다. 젊음만으로 헤쳐 나가기에 세상은 비집고 들어갈 틈 하나 없이 공고하게 굳어진 상태였다. 미숙한 경험과 지식으로 변화의 여지를 만들 수 있는 세상은 종말을 고했다. 은희는 웃음이 났다. 자신의 일은 인간 정신의 최후의 보루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던 며칠 전 TV 인터뷰가 생각났다.


커피 맛은 좋았다.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곳에서 즐기기에 적당한 맛이었다. 그러나 음악이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을 배려한 선곡일 것이라고 은희는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10년 전의 가요들이 어울릴 것으로 판단한 카페의 취향은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은희는 카페에 갑자기 정이 떨어졌다. 사람을 몰라보는 궁벽진 카페 따위에서 쓸데없는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죽이기에 자신은 너무 크게 성공한 사람이었다. 식은 커피 맛이 비위에 거슬렸다.


DALL·E 2024-06-21 13.40.19 - A depiction of Eunhee in her younger years, working as a waitress in a café. She is dressed in a typical waitress uniform, with a determined and hardw.png


활짝 열린 유리 천장으로 맑은 바람이 드나들었다. 집이 있는 전원주택 마을로 이어진 1차선 도로 양 옆에서 나무들은 손과 손을 잡고 달려갔다. 은희는 카페에서 못다 들은 클래식 음악을 크게 틀고 조수석의 창문을 열었다. 봄 나무들의 생기가 코를 통해 몸 안으로 밀려드는 듯 했다. 룸 미러를 보자 차가 한 대 따라오고 있었다. 차는 낯이 익었다. 카페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그 포르쉐였다. 차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은희는 시선을 앞으로 옮기고 말했다.


“타미, 저 차가 보이지 않도록 속도 좀 높여 줄래?”

“죄송합니다. 여기는 제한 속도 시속 50km 구간이며 저는 현재 정확히 50km의 속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과속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융통성 없는 타미의 대답을 들으며 우회전하자 포르쉐는 따라오지 않고 직진하여 사라졌다. 은희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앞에 대형 트레일러가 서 있었고, 그것의 뒷문이 열리고 있었다.


DALL·E 2024-06-21 14.18.15 - A red Ferrari speeding down a single-lane countryside road with dark-tinted windows, obscuring the interior of the car. The surrounding landscape is i.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