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오후여서 세상은 한가로웠다. 집을 향해 차가 드문 국도를 시원하게 내달리다가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고 싶은 마음에 은희는 ‘사람과 나무’라는 이름의 카페에 들렀다.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휴(休)의 의미를 가진 카페가 마치 자신의 지금을 위해 지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얀 벽과 파란색 둥근 지붕까지, 유럽풍의 외관도 흡족했다. 집까지는 차로 30분 남짓 걸릴 것이었다. 고속도로를 피해 국도를 택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일상에서 벗어난 자유인으로서의 달콤한 시간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유는 오직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었다. 남의 글이나 대신 써주면서 연명하는 민성 같은 존재에게 자유는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불쌍한 인간들에게 자유란 평생 획득할 수 없는 헛된 꿈에 불과했다. 실종되는 인간들도 결국 자기를 지켜낼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 돈은 곧 창이었고 방패였다. 폐부 깊숙이 자유의 공기가 밀려들었다.
카페 안에 들어서자 예쁘장하게 생긴 젊은 아가씨가 어서 오라고 인사했다. 카페 안에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 주차장에 있는 날렵하게 생긴 외제 스포츠카 한 대는 아마 카페 주인의 것인 모양이었다. 그는 분명 자신의 남편처럼 젊고 잘 생겼을 것이라고 은희는 추측했다. 세상은 그런 사람들의 것이었으므로. 돈을 가진 사람들은 늙지 않았고 세련되고 당당했다. ‘사람과 나무’에서, 은희는 오늘이 자신을 위한 완벽한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소음이 허락 없이 침투하지 않는 고요 속에서 커피 향과 음악을 마음껏 음미할 수 있을 것이었다. 피아노 협주곡이 성능 좋은 스피커를 빠져 나와 카페 안을 돌아다녔다.
“카페 모카, 따뜻한 걸로 부탁해요.”
숲이 바라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주문하자 예쁜 종업원은 방긋 웃으며 “네”라고 답하고 떠나갔다. 뒷모습에서 오래 전 자신의 젊은 시절이 느껴졌다. 공부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조아려야 했던 시절의 고통이 밀려오는 듯 했다. 돈으로 젊음을 얼마든지 연장할 수 있고, 원 없이 오래 살 수 있는 시대였다. 종업원의 풋풋함은 부럽지 않았다. 청춘이란 부질없는 낭만에 휩쓸려 시간과 몸을 탕진하는 무모한 시기였다. 인간의 젊음은 슬픈 것이었다. 젊음만으로 헤쳐나가기에 세상은 비집고 들어갈 틈 하나 없이 공고하게 굳어진 상태였다. 미숙한 경험과 지식으로 변화의 여지를 만들 수 있는 세상은 종말을 고했다. 은희는 웃음이 났다. 자신의 일은 인간 정신의 최후의 보루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던 며칠 전 TV 인터뷰가 생각났다.
커피 맛은 좋았다.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곳에서 즐기기에 적당한 맛이었다. 그러나 음악이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을 배려한 선곡일 것이라고 은희는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20년 전의 가요들이 어울릴 것으로 판단한 카페의 취향은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은희는 카페에 갑자기 정이 떨어졌다. 사람을 몰라보는 궁벽진 카페 따위에서 쓸데없는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죽이기에 자신은 너무 크게 성공한 사람이었다. 식은 커피 맛이 비위에 거슬렸다.
활짝 열린 유리 천장으로 맑은 바람이 드나들었다. 집이 있는 전원주택 마을로 이어진 도로 양 옆에서 나무들은 손과 손을 잡고 달려갔다. 은희는 카페에서 못다 들은 클래식 음악을 크게 틀고 천장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봄 나무들의 생기가 코를 통해 몸 안으로 밀려드는 듯 했다. 뒤를 돌아보자 차가 한 대 따라오고 있었다. 멋쩍은 기분에 은희는 고개를 내려 안으로 내려왔다. 뒷 유리를 통해 보이는 차는 낯이 익었다. 카페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그 스포츠카였다. 짙은 검정색으로 선팅이 되어 있어 차 안은 들여다뵈지 않았다. 차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은희는 시선을 앞으로 옮기고 말했다.
“타미, 저 차가 보이지 않도록 속도 좀 높여 줄래?”
“죄송합니다. 여기는 제한속도 시속 70km 구간이며 저는 현재 정확히 70km의 속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과속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융통성 없는 타미의 대답을 들으며 뒤를 돌아보자 차는 보이지 않았다. 은희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운전석 쪽에서 무엇인가가 부딪혀 왔고 은희의 차는 균형을 잃고 도로 옆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