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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Oct 15. 2024

시간 시장(Time Market)-10

채린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비가 햇살에 데워졌던 도시의 체온을 급격히 식히자 사람들은 우산 아래에서 저마다 몸을 움츠리며 걸었다. 시우는 행주대교를 건너 막 자유로에 올라탄 참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량들이 가득한 반대 차선과는 달리 외곽으로 뻗은 토요일 저녁의 도로는 한적했다. 빗줄기는 줄어들지도 늘어나지도 않은 채 일정한 리듬으로 차창을 두드렸다. 


“여보세요?”

토요일 아침의 조깅을 즐기고 샤워를 마친 시우는 낯선 번호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오시우 연구원님?”

여자의 목소리는 청아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의 이치에 달관한 사람의 것처럼 차분했다.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시간 시장에 대해 상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우의 목으로 마른 침 한 덩이가 꼴깍 넘어갔다. 

“무슨 말씀이신지?”

“오 연구원님이 다크 웹사이트 ‘레유베나티오(rejuvenatio)’의 운영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경찰이나 정보 요원 같은 것은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오 연구원님의 취지에 동감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시우는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음을 곧바로 인지했다. 


자유로를 벗어나 여자가 알려 준 주소지로 향하는 동안 비가 그쳤다. 조수석의 창문을 열자 신선한 밤 공기가 밀려들었다. 시우는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풀었다. 차가 멈춘 곳은 예술인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한 카페 앞이었다. 양 옆에 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선 오르막길을 오르자 숨겨진 보물처럼 눈앞에 나타난 회색 벽과 통 유리창이 조화를 이룬 건물에는 ‘아르카나 소키에타스(Arcana Societas)’라고 쓰인 필기체의 네온사인이 달려 있었다. 안경을 쓰자 우측 상단에 ‘라틴어. ‘비밀스러운 사이’라는 뜻’이라는 정보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실내의 은은한 주광색 빛이 창을 통해 주차장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1층의 조명이 꺼지고 2층으로 이어진 계단 조명만 남았다. 위로 올라오라는 뜻일 터였다. 2층에 도착하자 계단에서 가장 먼 곳의 창가 소파에 여자가 앉아 있었다. 옅은 미소를 띠고 여자는 시우에게 시선을 던졌다. 시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여자의 맞은 편에 앉았다. 탁자 위에서 빨간색 초가 타고 있었다. 쥐색 정장을 입은 여자와 캐주얼 복장의 시우, 그리고 촛불이 창에 어리고 있었다. 

“오시느라고 고생하셨어요. 유채린입니다.”

여자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제의했다. 시우는 담담히 손을 잡았다. 채린의 손은 차가웠다.

“손이 차죠?”

채린이 시우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듯 담담히 말했다. 청아한 목소리는 조각처럼 매끄러운 채린의 하얀 얼굴을 더욱 이지적으로 보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미녀 서빙 안드로이드가 다가와 술과 음식을 세팅하는 동안 채린은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침묵했다. 가슴에 달린 명찰에 ‘Robot Amica’라고 쓰여 있지 않았다면 그녀는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수고했어, 아미카. 부르기 전까진 쉬도록 해.”

안드로이드가 두 사람의 잔에 와인을 따르기를 마치자 채린이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도미나.”

“식물성 단백질로 만든 스테이크예요. 마음에 드는 맛일 겁니다.”

채린이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라틴어를 많이 쓰시는 군요.”

“직설적이지 않아서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시켜 주죠. 상징성을 신비롭게 담아내는 그릇 같은 멋이 있는 언어이기도 하구요. 무엇보다 제가 좀 오래된 것을 좋아하거든요. 시우 씨도 그렇지 않나요? 시장하실 텐데 먼저 좀 드세요. 밤은 기니까요.”

“맛있군요. 와인도 스테이크도.”

“고마워요. 오늘은 특별히 제가 요리했답니다.”

채린의 큰 눈망울과 붉은 입술이 시우의 마음에 파동을 일으켰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왠지 전에 알았던 사이처럼 느껴졌다. 느낌의 근거가 될 만한 기억을 더듬었지만 시우의 손에 닿는 것은 없었다. 

“시우 씨가 레유베나티오의 운영을 중단해 주었으면 해요.”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정부와 기업들이 당신을 노리고 있어요. 당신의 행위가 시간 시장의 취지에 반하니까요.”

“근거가 뭡니까?”

“설마 저도 아는 것을 그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진 않으시겠죠?”

그랬다. 눈앞에 앉아 있는 채린이 곧 증거였다.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었다면 분명 그들이 잠자코 있지는 않을 터였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아직은 시우 씨라고 확정하진 못한 것 같으니까요. 사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시잖아요? 지금 친구분을 통해 하는 일은 오래가지 못해요. 친구 분이 위험합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음지에서 해온 일을 제가 양지로 끌어 올릴게요.”

“어떻게요?”

“대신 당신은 다른 일을 해 주셔야 해요.”

채린이 가방에서 밀봉된 서류 봉투를 꺼내 시우에게 건넸다. 두툼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시우가 채린의 눈을 바라보자 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봉투를 뜯자 낡은 검정색 스프링 노트와 오래되어 색이 바랜 편지 봉투가 나타났다. 편지 봉투의 겉면에는 ‘To 오시우 of 2041’이라고 적혀 있었다. 시우는 자신의 필체가 확연한 편지를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나의 친구이자 나 자신인 시우에게.

이 편지는 과거로 간 나로 인해 혹시라도 지금의 나인 자네의 선택에 문제가 생길까 염려하여 남기는 것이네. 혹시라도 자네가 이전에 내가 내린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이 편지를 쓰는 나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고, 자네 앞의 채린도 사라질 것이며, 세상도 바뀌지 않을 것이니까. 채린은 자네가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막대한 부를 보유하고 있네. 자네가 시간 시장에서 희생되는 일단의 사람들을 도왔던 일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합법적인 일을 세린이 시작할 거야.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구하는 일 말일세. 물론 놈들이 순순히 당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잘 알아. 그래서 70년간 준비했던 계획이 동시에 진행될 걸세. 

이제 자네는 이노큐라를 떠나 디그니바이로 넘어가야 하네. 그것이 원래 자네가 실행했던 일이고 내가 존재하는 이유지. 지금 자네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생각이고. 채린이 자네가 중단하는 이노큐라의 연구를 인수할 거야. 이노큐라는 채린이 제시하는 조건을 거부하지 못해. 이미 자네가 완성한 공식을 토대로 채린은 신약을 출시할 것이고 그것이 시간 시장을 붕괴시키는 첫 번째 과업이 될 것이야. 

디그니바이가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는지 채린이 설명해 줄 것이고, 그것은 자네가 친구 철훈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정확히 일치할 것이네. 디그니바이 대표 이석우를 설득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야. 이미 자네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이지. 디그니바이는 자네 생각보다 훨씬 더 깊숙이 시간 시장과 관련되어 있네. 사실상 이석우의 영향력 아래에서 만들어진 것이니까. 

자네와 만날 수는 없었지만 오랫동안 자네를 지켜봐 왔네. 그것은 마치 내 삶을 하나씩 복기하는 듯한 느낌이었어. 미리 말하지만 자네의 마음속 계획은 잘 진행되어 왔네. 적어도 지금까지는. 확신을 갖고 나아가면 되네. 자네도 나도 오시우이니까. 망설임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지.

채린은 나와 오랫동안 함께한 동지일세. 우리가 연결되어 있는 만큼 아마도 자네에게도 느낌이 있었겠지. 서로의 할 일을 하세. 그리고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편지와 노트는 이곳에서 소각시켜 주게. 


편지의 끝에는 시우 자신의 서명이 또렷이 기입되어 있었다. 과거로 가는데 성공했구나. 아직 실행하지 않은 미래의 일이 씨앗이 되어 줄기를 세우고 가지를 뻗었다는 사실에 시우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동봉되어 있는 노트 안에는 과거의 시우가 행한 굵은 발자취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시우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런 시우를 채린이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당신과의 이야기, 조금만 들려 줄래요?”

“그럼요. 케르테.”채린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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