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교의 어린 시절 모습들 (자료 제공: 삼성안내견학교)
지교라는 이름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니다. 삼성안내견학교에서 붙여준 이름이다. 지란지교 할 때 지교냐고 사람들은 내게 자주 물었다. ‘~의 사귐’이 이름이 될 리는 없다. 나는 그저 웃었다. 사전에서 지교를 찾으면 ‘至交; 깊은 교분, 두터운 교의’라는 뜻의 단어가 나온다.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나는 지교의 한자를 이것으로 삼았다. 지교와의 ‘지극한 사귐’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영화 ‘마음이’를 통해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시각장애인 안내견에 대한 인식은 부족하다. 지교와 마주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지교가 래브라도 리트리버 종임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대부분 진돗개라고 생각하고 기겁하기 일쑤였다. 한참 예민한 감수성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중인 사춘기 청소년들도 비슷했다. 오늘날에도 사자와 코끼리는 아는데 안내견을 모르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인간의 영역에 가장 가까이 들어와 있는 반려동물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교육은 상식적이지 않다. 동물원 우리에 갇힌 구경거리, 석쇠에 올라온 살코기, TV 화면을 스쳐가는 이미지로만 동물을 접하게 만드는 사회는 천박하다. 학교와 사회에서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동물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야 한다. 그래야 동물을 학대하는 일이 사라진다. 건강할 때는 예뻐하다가 늙고 병들면 낡은 인형과 고장 난 장난감처럼 몰래 내다 버리는 일이 없어진다. 생각해 봐야 한다. 동물들을 아끼고 동물들의 생명을 존중하고 동물들의 복지를 중요시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삶이 어떠할지를 말이다. 우리는 정확히 그 반대편에서 살고 있다.
“현대사회의 교육은 세뇌로 바꿔 읽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쉽다”고 노엄 촘스키가 말한 바대로 어쩌면 우리의 뇌는 말끔히 덧칠 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돈과 성적의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 세상이야 어디로 흘러가든 말든, 남이야 어떻게 살아가든 말든 ‘나’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전력투구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다른 생명들에게 관심을 돌릴 틈이 없다. 돈이 없으면 사랑이 무너지고, 성적이 뒤쳐지면 희망이 붕괴된다. 결국 사회 전체의 미래가 날이 갈수록 어두워진다. 서로 격려하고 함께 인내하며 더불어 손을 잡는 일은 세상에서 점점 실종되어 간다. 『철학자와 늑대』에서 마크 롤랜즈는 질문한다. “대표적인 인간의 가면은 ‘행복 추구’였다. 지금까지 엄청난 크기의 숲이 희생되어 행복의 비밀을 알려 주는 책들이 만들어졌지만 왜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까?”
사귐에 지극함이 없기 때문이다. 온라인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지만 가슴을 활짝 열어 소통할 사람은 적다. 먹고 사는 일에 시간을 모두 잠식당하는 바람에 영혼의 근육을 단련할 짬을 내기 어렵다. 일과 관련된 기능적 자기개발에 집중하는 바람에 정작 일에서 밀려나면 곧바로 삶이 피폐해지는 비극적 현실에 직면한다. 지속적 소비를 조장하는 자본주의의 물신성에 중독되어 타인의 시선에 삶의 수준을 맞추느라 물질에 대한 소유의 욕망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생계조차 어려운 사람들의 고통과 경제활동에서 배제되는 청년세대의 슬픔에 공감할 여유조차 없다.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보기 때문이다. 노력하는 사람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대신 현재의 성과만으로 구제불능의 낙인을 찍어 버리는 까닭이다. 파편처럼 흩어진 사람들로 인해 공허해진 자리를 개와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이 메우고 있다. 시간이 흘러도 그 자리에 사람들이 다시 들어올 확률은 낮다. 오히려 로봇이 채울 개연성이 높다. 인공지능 로봇과의 가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세상, 우리의 미래는 그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듯하다.
하나의 존엄한 주체적 인간이 아니라 생산성을 증명하고 소득이라는 생계유지와 생활지속 수단을 확보해야 하는 객체적 인적자원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은 물질 문명이 첨단화될수록 그것으로부터 소외되어 갈 것이 틀림없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기꺼이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선택하는 현대인의 심리에 대한 에리히 프롬의 탁월한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불안의 근본적인 해소의 길은 연대에 있다. 연대의 뿌리는 지극한 사귐이다. 깊어야 신뢰가 싹튼다.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불행으로부터 보호될 것이라는 약속, 누군가 곁에서 함께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확고할 때 불안은 소멸된다. 불행을 담보로 가입하는 보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인간 연대의 구축이다. 가족이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간의 모임이든 연대를 공고히 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연대의 고리가 느슨해질 때 관계는 해체되고 불안한 개인은 양산된다. 사회적 안전장치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교를 키우면서 나는 나 자신과 약속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지교의 곁에 있겠다고. 그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기여하는 삶을 살겠다고. 나는 사람들에게 반려동물과 함께하라고 말한다. 반려동물을 맞아들인 삶이 생명간의 지극한 사귐의 의미를 가르쳐줄 것이라고,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깨닫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적어도 내게는 그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