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은 지드 얘기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대신 쓸데없는 소소한 질문들을 해댔다. 청소년 시절의 꿈과 그 꿈을 갖게 된 이유 따위를 물었다. 가장 기억나는 여행지의 추억을 묻기도 했다. 그 질문 앞에서 은희는 오랫동안 답을 적지 못했다.
글을 쓰기 시작한 뒤로 민성은 국내 여행지를 좋아했고 은희는 언제나 외국을 좋아했다. 민성은 산과 바다를 좋아했고 은희는 으레 그렇듯 도시를 좋아했다. 민성은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을 좋아했고 은희는 늘 사람으로 북적대는 곳을 좋아했다. 산과 바다의 고요 안에서 은희는 외로웠고, 도시의 부산스러움을 민성은 괴로워했다. 은희는 도시와 도시를 빠르게 넘나들며 도시의 흥겨움을 느끼고 싶어했고, 민성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작은 시골 마을을 골라 눌러 있고 싶어했다. 둘의 여행은 출발되지 못했다.
관광용 구식 열차를 타고 무박 2일로 떠난 여행에서 민성은 프로포즈했다. 열차가 멈춘 종착역 플랫폼에서 바로 연결되는 해변으로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며 달려갔고 민성은 은희의 손을 잡고 느리게 걸었다. 새벽 2시, 하늘 끝에서 파도가 쉼 없이 달빛과 별빛을 실어 날라 오는 해변에서 민성은 무릎을 꿇고 은희에게 결혼해 달라고 말했다. 별이 가득한 민성의 눈동자는 순수해서 아름다웠다. 여전히 닿을 수 없는 이상의 빛에 매혹되어 있던 은희는 그의 소박한 프로포즈를 수줍게 받아들였다. 민성은 가난했지만 장래가 창창한, 준비된 성공자였다. 해변에서 모닥불을 지피고 놀던 사람들은 폭죽을 터뜨리며 축하의 함성을, 노래를, 춤을 선물해 주었다. 은희는 행복했다.
화면은 꺼졌고 그뿐이었다. 화면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은희가 25층에 있던 날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