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는 TV 화면 속의 민성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처럼 당당한 민성의 모습은 그날 밤 이후로 한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민성의 말은 또한 이전보다 더욱 세련되어 있었다. 민성은 언제나 가로로 입술을 굳게 여미고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말만 꼭 필요한 상황이라고 생각할 때에 내뱉었다. 지금의 민성은 밝고 화사했고 논리정연하고 유머러스했다. 은희가 사랑했던 시절의 민성의 모습이었다. 은희는 TV를 껐다. 민성의 두 신작은 탁월한 걸작이었다.
1년이 훨씬 지났지만 실종된 100일 동안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 일정을 지키지 못한 출간 건들에 대해 작가들은 배상을 요구했다. 이미 다른 출판사들과 별도의 진행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짐작했지만 은희는 그들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할 일을 기다리는 옴에게 은희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왠지 더는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공백 기간의 경험이 자신에게 뭔가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었지만 다만 추측할 뿐, 기억의 실체는 더듬어지지 않았다.
은희가 출판사를 접기로 하자 남편은 불같이 화를 냈다. 정치하는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데 그렇게 무책임하게 그만둘 수 있느냐, 실종을 핑계로 어디 머리 식히러 가서 그런 생각이나 하고 온 것이냐, 혹시 다른 남자와 밀월여행이라도 다녀온 것 아니냐며 소리를 질렀다. 옴을 팔아서 매각대금을 모두 가지라고 은희가 말하자 남편의 분노는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위자료라고 은희는 말했다. 남편은 대꾸하지 않았다.
“세상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기차가 달리고 있는 거란다.”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기차 안에서 아버지는 어린 은희에게 자주 말했다. 은희는 어려서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국문학을 전공한 아버지는 이름을 얻지 못했다. 생계를 위해 작은 출판사의 편집장을 오랫동안 했지만 성공작을 내지 못한 출판사는 늘 영세했다. 아버지는 낮에 일하고 밤에 집에서 늦게까지 글을 썼다. 아버지의 글을, 사람들은 읽지 않았다.
종이책이 금지된 어느 날, 아버지는 세상을 저주하며 술을 마셨다. 손가락에 닿는 종이의 질감과 종이에 새기는 생각의 흔적이 사라지는 이유를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출판사가 문을 닫은 후 아버지는 세상을 향한 문을 안에서 잠가 걸었다. 종이 없이 아버지는 글을 쓰지 못했다. 연락 없이 며칠씩 사라졌다 돌아온 아버지는 방에 들어가 벽을 보고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 그러다 소리를 삭이며 울었고 기진해 쓰러져 잠들었다.
한달 후에 나타난 아버지의 머리는 깎여 있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기차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달리는 거야, 은희야.” 세상은 어떤 경우에도 꿈쩍하지 않으니 기차에 올라타야 한다는 말은, 멈춰선 기차에 오른 채 달리기를 원했던 한 세상 부적응자의 한탄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버지는 기차가 있는 세상의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고아원에서, 은희는 오랫동안 기차와 세상의 꿈을 꾸었다. 기차와 세상은 날마다 번갈아 가며 질주했다. 엄마의 유골이 묻힌 바닷가 소나무 앞에서 은희는 기차든 세상이든 그 무엇도 자신을 싣고 내달리기를 기대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은희는 쉬지 않고 뛰었다. 아버지의 재능은 은희의 피에 탑승해 멈추지 않고 따라왔다. 은희는 유전자의 집요함에 절규했다.
‘사랑과 나무’ 카페는 그 자리에 있었다. 전과 다르게 낮부터 주차장은 차들로 빼곡했다. 그 동안 많이 알려진 모양이었다. 그날 세워져 있던 차는 보이지 않았다. 카페 안에서 사람들은 듬성듬성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소곤거리고 있었다. 음악이 목소리를 눌러서 사람들의 말은 들리지 않아 좋았다. 전에 근무하던 직원이 그대로 있었다. 은희를 기억하는 듯 못하는 듯 알 수 없는 미소를 띠고 주문을 받아갔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테이블 위에 띄운 신문에서는 근래 들어 UFO의 출몰이 부쩍 잦아졌다는 소식을 메인으로 전하고 있었다. UFO들의 방문 목적을 두고 전문가들의 난해한 해석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1년째 실종신고가 접수되지 않았고 더 이상 밤거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로 경기가 살아나고 있다는 기사가 뒤를 이었다. 유엔 사무총장이 출근 중에 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뉴스도 있었다. 지난 주 의회 연설 중에 심장마비로 즉사한 미국 대통령, 휴양지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다 사망한 세계은행 총재, 주주총회에서 10개 회사의 인수 필요성을 설명하다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진 세계 최대 기업의 CEO 등 세계 주요 인사들의 사체에 대한 부검 결과 과로와 스트레스의 상관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났다고 기자는 말했다. 의학기술을 믿고 건강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조언까지 곁들였다.
“커피 나왔습니다.”
여직원은 커피잔이 올려진 쟁반을 내려놓고 촘촘히 사라졌다. 쟁반에는 하얀 도자기 커피잔과 선물 포장된 네모난 물건이 놓여 있었다. 이건 뭐냐고 여직원을 부르려는 찰나 상자 옆면에 ‘To 이은희’라고 쓰인 글자가 보였다. 포장을 뜯어 금속상자를 열자 구릿빛 달걀이 빨간 천이 덮힌 홈 위에 놓여 있었다. 달걀은 묵직했다. 실제 구리로 만든 달걀인 것 같았다. 은희는 달걀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음악이 녹아 있는 것처럼 달콤했다. 구리 달걀이 바르르 떨었다. 달걀 위에 영상이 떠올랐다. 어둠침침한 화면 안에 초췌한 얼굴의 자신이 있었다.
창 밖에서 햇살이 별똥별처럼 쏟아져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