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VII

by 오종호

강원도에 위치한지라 딱 하나 공기는 나무랄 데 없이 좋았던 캠퍼스에 오랜만에 들어서자 방학 중이라 학교에서 사라진 학생들을 대신하여 여름 끝을 아쉬워하는 매미들이 극성맞게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흐르는 땀을 와이셔츠 소매로 훔치며 시바르는 서둘러 뒷산의 동굴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오냐, 시바르?”


입구를 가린 나뭇가지들을 피해 엉금엉금 기어 들어가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뻥카였다. 그 옛날 그 날처럼 오래된 플래시를 켜둔 채 오푼이 멤버들이 모여 있는 게 아닌가. ‘뻥카, 주전자, 방글라, 부사장… 어, 부사장?’


“니들 이게 어찌된 일야? 부사장님은 여기 왜?”


눈을 휘둥그래 뜬 채 반쯤 얼이 빠져있는 시바르의 발 앞에 각자의 앞에 놓여 있는 것과 똑같이 생긴 가방을 휙 던져 놓으며 뻥카가 자기는 원래 국정원 요원이었는데 밝힐 수는 없지만 지난 15년간의 더러운 공작에 대한 자기만의 셀프 보상을 어제 막 끝내고 이제 나라를 뜨려 하는데 그 전에 불쌍한 놈들 한 번 보려고 왔다는 것이다. 그러자 부사장이 5백만원짜리 다발 하나를 들어 뻥카의 머리를 내려쳤는데 서류로만 맞아보았던 시바르는 왠지 그 모습에서 묘한 질투심이 들었다. 여하튼 뻥카는 입을 다물었고 이어서 방글라가 들려준 얘기는 이랬다.



어느 날 뻥카가 방글라를 찾아왔었다. 뻥카는 무릎을 꿇고 방글라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봉투와 가방을 건네주더라는 것이었다. 봉투 안에 들어 있는 수표에는 1,500,000,000원이라고 씌어 있었고 가방에는 5만원권 100장 묶음이 100개 들어 있어서 이 뻥쟁이 새끼가 또 무슨 뻥을 치려고 지랄을 하나 싶었다는데 뻥카가 무릎을 꿇은 채 방글라에게 한 얘기는 이렇다는 것이었다. 믿든 믿지 않든 자기는 오푼이의 맹세를 지키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자기 외엔 총대를 맬 놈이 없어 보였다는 것이었다.


“부모, 형제도 없이 찌질하다고 남들 손가락질이나 받던 놈들이 대학까지 와서 함께 만났다는 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이냐? 난 돈을 벌고 싶었다. 니들 잘사는 꼴 보는 게 내 유일한 낙이었다. 나는 쓰레기가 되어가도 남들 가슴에 대못 박아도 니들 만은 잘살게 해주고 싶었다. 그때 니 여자친구만 걸리지, 아니 만나지 않았어도 진작에 다 이루는 거였는데… 하여간 그 일은 진심으로 미안하다. 이제 와서 말인데 그 여자분 한테는 돈 다 돌려줬었다. 방글라야. 딱 100억 다섯 등분 한 거다. 내일 은행가서 수표, 통장에 넣어 보면 알게 될 거야.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줘라”


뻥카의 계획은 굉장히 복잡한 내용이었지만 한마디로 압축하면 ‘한탕 해서 함께 튀자’는 뭔가 철학적으로 굉장히 심오한 것이었다고 한다. 먼저 뻥카는 시바르를 중심에 올려놓고 작전을 설계했다고 한다. 시바르의 인생이 뭔가 가장 불쌍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시바르의 입에서는 ‘이런 시바르’가 자동으로 튀어 나왔다.


뻥카는 시바르가 다니던 회사를 심도 있게 분석해 보았는데 25년간 아주 탄탄한 실적을 일궈 왔고 건물과 토지 등 알짜배기 부동산도 잔뜩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 조또 개 시바르."


시바르는 항상 회사가 어렵기 때문에 아무리 올려주고 싶어도 자기 월급을 인상시켜줄 수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서 회사 사정이 좋아지면 나중에 고생한 몫까지 다 챙겨서 주겠다는 말을 믿고 조금만 기다린 게 어느새 18년이 되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가슴 속에서 열이 뻗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지만, 이 말을 입밖에 내면 왠지 사푼이들한테 멍청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만 같은 지혜로운 생각이 들어서 입은 꼭 다문 채 속으로 자신의 이름을 열심히 되새기기만 했다.


시바르가 속으로 뭔 소리를 지껄이든 말든 방글라는 뼛속의 에너지까지 끌어내어 설명을 이어갔는데, 뻥카가 시바르 사장 회사이자 시바르가 쥐꼬리보다 적은 월급을 받고 다니는 회사의 회계사를 찾아가 국정원 명함과 그 위에 볼펜으로 적은 회사명을 슬쩍 보여주자 갑자기 손을 잡아 이끌어 골방으로 끌고 가더니 모든 것을 술술 불더라는 것이었다. 사실 시바르만 빼놓고 직원들은 모두 시바르 사장의 일가친척에 사돈에 팔촌에 친구의 자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가 족같은' 회사였는데, 주로 수출로 돈을 벌던 사장이 수입으로 눈을 돌리고 나서 국내 유통을 전개하는 중에 자기 기준으로는 가족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세운 페이퍼 컴퍼니들과의 거래실적을 부풀려서 엄청난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것이었다. 회계사의 말이 자기가 받은 뒷돈은 그다지 많지 않고 사실 세법상 편법은 맞지만 불법은 아니기에 자기는 당당하다는 거였다. 사실 대기업들은 다 하는 짓을 중견기업이라고 못할 것은 무엇이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 아니겠느냐, 세무서면 몰라도 국정원까지 나설 일은 아닌 것 같다고 제법 호기를 부렸다고도 한다. 순간 국세청 명함을 만들어 왔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동시에 뻥카가 신 내린 입술 사이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나직하게 쏟아내자 그 순간부터 회계사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조성을 도와준 그 비자금이 북으로 올라간 정황이 포착되었소. 당신도 국가보안법 처벌을 피하기는 어려울 거요.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바르가 점심 먹으러 나간 사이에 회계사의 명함을 들고 가서 사장을 만났는데 사장이 국가보안법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책상 아래서 숭구리당당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을 뻥카는 놓치지 않았다고 했다. 뻥카는 해먹어도 너무 심하게 해먹어서 국가정보기관의 비위를 상하게 한 것이 사장의 실수였다며 이제부터라도 잘못을 씻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는 것이다. 국가는 언제나 건실한 기업가들 편이며 지금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정도 경영에 힘쓰기만 한다면 자신이 나서서 과거의 모든 죄는 없던 것으로 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마른침을 삼키며 듣고 있던 사장이 기업공개라는 단어에 표정이 굳는 것을 놓치지 않고 뻥카가 의자의 표면으로부터 엉덩이를 약 1.9cm 들어올리려는 찰나 사장이 번개같이 두 손을 잡고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했다는 것이었다. 대신 한가지 부탁을 들어달라고 했다는데 그것은 직원 중에 시바르라고 하는 녀석이 있는데 과거에는 높은 수출실적을 거두어 회사를 성장시키는데 기여했지만 이제 수입과 유통, 제조로 방향을 튼 현시점에서는 고임금에 비해 전혀 쓸데없는 놈이며, 자칫 나중에 후환이 될 수가 있으니 ‘제거’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뻥카가 ‘제거’라는 용어는 매우 프로페셔널 한 용어로서 스파이 세계의 냄새가 나니 순화해서 사용하지 않으면 자기와의 관계에서 약간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지적하자 사장은 ‘자발적 노동유연화에 해당될 수 있도록 현명한 조치’를 부탁했다고 한다.


“이런 개 시바르 조또!”


기업공개 주관 증권사는 뻥카가 잘나갈 때 사귀었던 여러 사람 중에서 영화 타짜와 레인맨, 그리고 민요 정선아리랑을 좋아했던 임원이 있는 회사로 선정했다고 한다. 뻥카가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한바탕 놀아보세" 라고 했더니 임원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는 것이었다.


기관, 외국인은 물론 개미투자자까지 25년 업력의 안정된 무역과 유통파워 기반에 풍부한 자본을 무기로 3D프린터시장과 스마트폰 기반의 4D 게임시장에 뛰어든다는 소문이 무성한 회사에 자금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특히, 투자발표회에서 공개한 4D 게임의 동영상은 압권이었는데 특수안경 없이도 스마트폰으로 모든 분야의 게임을 4차원으로 즐김으로써 오감을 만족시키는 궁극의 쾌락을 경험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전 세계 게임시장을 순식간에 장악할 수 있다는 언론기사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물론 시바르에게는 금시초문이었지만.


뻥카는 마침내 방글라에게 동남아에 가서 최고의 아지트로 삼을 만한 주택을 비밀리에 매입해달라는 부탁이자 특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표정과 말투가 완전히 국정원 요원의 것이어서 ‘이 새끼가 실제로 국정원 요원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여하튼 기업공개를 통한 유입자금 중 증권사 임원이 120억원을 빼내서 20억원을 제외한 나머지 100억을 뻥카에게 보냈는데 적어도 며칠 동안은 드러날 우려가 없는 이유는 회계사의 도움을 받아 사장 가족의 명의로 되어 있는 사장 돈 120억을 공모 계좌로 추가 이체시킴으로써 전체 총액에는 변함이 없도록 맞춰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며칠 동안 기다리지 말고 오늘 당장 동남아로 떠야 하는 이유는 아마도 증권사 임원의 손이 근질근질해서 카지노로 오늘밤이라도 달려가 내일 아침이면 추가 횡령을 시도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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