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만난 남자와 신이 된 남자의 승부
그대의 미래에 대해 누군가 예단하려 든다면
그대의 미래는 그의 말을 제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집을 나서자 찬바람이 옷을 뚫어 살 속을 비집고 달려들었다. 두꺼운 이중창을 거침없이 통과하여 거실 바닥을 따스하게 물들였던 햇살은 바람이 장악한 집밖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집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누르며 영진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스마트폰의 연락처 목록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텅 빈 놀이터 위로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회장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회장이 조금 더 기다리라는 문자를 보내온 지도 1년이 경과했다. 그룹 계열사의 사장단 전면교체 발표가 난지도 6개월이 지났다. 영진에게 기회가 돌아갈 수 있다고 얘기했던 계열사의 사장직은 외부에서 고용된 전문경영인에게 돌아갔다. 인적 쇄신을 통해 그룹사 전체의 동반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뼈를 깎는 결정이라고 며칠 전 TV 속의 회장은 비장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회장은 당시 인터뷰에서 다시 며칠 후에 그룹사의 운명과 관련된 중대발표를 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모든 언론에서는 자신을 대신할 그룹사의 새 주인을 소개하는 일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영진은 테헤란로의 한 카페에 앉아 영태를 기다렸다. 점심시간이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거리에는 말쑥한 정장을 빼 입고 전화 통화를 하며 바삐 거니는 직장인들로 빼곡했다. 웬만한 음식값보다 비싼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카페 안의 사람들이 영진에게는 이국의 풍경처럼 생소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커피가 준비되었음을 알리는 진동벨이 손안에서 바르르 떨렸다. 앳된 얼굴의 아르바이트 직원이 “맛있게 드세요”라는 말과 함께 건넨 커피 맛은 그녀의 표정만큼 무미無味했다. 시계바늘이 11시 41분을 가리켜 영태가 나오기로 한 시각에서 11분이 지나고 있었다.
- 영진이냐? 야, 미안하다. 회의가 이제야 끝나서. 그런데 또 미안해서 어쩌냐? 부장이 거래처 점심 접대 나보고 하라고 한다. 졸라 짜증나네. 진짜 미안하다. 내가 담에 술 살게. 야, 야, 미안. 나중에 전화할게.
12시가 막 지났을 무렵 벨이 울린 전화기에서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태는 자신이 약속장소에 나올 수 없는 이유를 회사에 전가시켰고 그것이 상대로 하여금 그 어떤 반박도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절대적인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음을 확신하는 듯했다. 영태는 영진이 전화를 받을 때 말했던 “어”라는 단어가 마치 순서상 자신의 대사 뒤에 위치한 추임새인 양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 온기가 사라진 커피가 아직 반 정도 남아있었다. 맛을 느낄 수 없는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물고 영진은 한참 동안 목 뒤로 넘기지 않았다. 혀에 쓴맛이 돌았다. 입안의 커피를 꿀꺽 삼키고 커피잔을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문을 열고 나가는 동안 영진에게 시선을 던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