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세무민遯世无悶

세상을 멀리해도 번민하지 않는다.

by 오종호

내가 너의 기쁨이 될 수 있다면 노래 고운 한 마리 새가 되어도 좋겠네. 너의 새벽을 날아다니며 내 가진 시를 들려주겠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이토록 더운 사랑 하나로 네 가슴에 묻히고 싶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네 삶의 끝자리를 지키고 싶네. 내 사람이여 내 사람이여 너무 멀리 서 있는 내 사람이여. - 백창우



꿈을 꾸었다. 길고 어지러운 꿈이었다. 꿈에서, 그녀는 예전의 환한 얼굴로 내 옆에 있었다. 평생 그녀 한 사람만을 위해 살아가길 희망하던 날들의 설렘과 고통은 꿈속의 심장에 고스란히 전해졌고, 꿈 밖으로도 실려 나왔다. 내가 아닐 때 그녀는 더 행복할 수 있었고 그녀 없이 나는 나의 길을 걸어가야 했기에 나는 그녀에게 모질었다. 내가 줄 수 없는 수준의 사랑을 원하는 사람에게 나는 나를 버리고 증오할 근거를 주어야 했다. 동시에 그것은 내가 다시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는 멍에가 되어야 했다. 나는 그녀에게 질기게 모질었다. 꿈에서, 그녀를 향한 손짓은 허공에 매달렸고, 그녀의 이름은 내 목구멍을 넘어오지 못했다. 나의 손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고 그녀는 그저 미소 짓고 있었다.


빗방울이 새벽 지붕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등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기억 속에서 자꾸 신물이 넘어왔다. 진짜 사랑을 했기 때문일 터였다. 내 사랑이 진짜가 아닐 때 그녀는 행복할 수 있었다. 그녀는 행복할 것이었다.


날이 개기 무섭게 우수사가 청주와 돼지 두 마리를 가지고 왔다. 돼지 울음소리에 휴일의 통제영에 활기가 돌았고 화병들은 피곤함도 잊은 채 돼지를 잡아 끓이는 내내 신명난 표정을 지었다.


웬 돼진가? 부산포를 드나들던 보부상이 제법 자리를 잡은 모양입니다. 술은? 창고를 정리하다 왜놈들이 땅 밑에 파 놓은 주고酒庫를 발견했습니다. 두 동이가 남았더군요.


따뜻하게 데워진 왜의 술은 조선의 곡식과 조선 백성의 노고로 빚어졌을 터였다. 한 잔 받으시지요, 장군. 내 생각을 멈추려는 듯, 우수사가 술병을 들었다. 왜놈들 덕에 병사들이 술맛을 다 봅니다. 웃음보가 터진 병사들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 저하께서 여러모로 노고가 많으시다 들었습니다, 장군. 그 놈의 대신들이 그러면 그렇지. 우수사, 말을 가려 하게. 나즉이 말하며 술잔을 들었다. 씁쓸한 표정으로 우수사도 잔을 비웠다.


세자 책봉을 두고 조정 대신들은 오랫동안 날을 세워 다퉜다. 그들은 세자가 즉위한 뒤에도 공공연히 세자의 정책을 비판하며 흔들어댔다. 전선을 떠도느라 조정의 중심에서 오랫동안 비켜나 있던 세자와 그들 사이에는 끈이 없었다. 그들에게, 오랜 전란을 현장에서 직접 겪으며 쌓은 세자의 지도력과 백성들의 지지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백성과 나라를 위한 개혁적 성향의 임금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 줄 무색무취의 허수아비가 필요했다. 전장에서 학문을 닦고 역량을 기른 세자를 그들은 적통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은 노종 임금 시절의 향수를 떠올리고 있었다. 여전히 언로는 그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돈도 그들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그들 중의 상당수는 세자가 아니라 유노 소쿠요루와 연이 닿았다. 나는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춰져 있는 욕망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있을 곳은 바다였다. 나는 조정을 향해 칼끝을 돌릴 수는 없었다. 나는 세자를 믿었다. 그라면 해낼 수 있을 것임을, 전장에서 그를 보았을 때 나는 알았다. 그가 오를 곳은 보위였고, 나는 바다에 있을 것이었다. 왜의 술을 마시며, 나는 조정으로부터 조금 더 멀어졌다. 우수사도 그럴 수 있을 것이었다.


일찍 먹고 마시고 잤던 병사들이 근무를 나갔고, 경계병과 순찰병이 돌아와 먹고 마셨다. 이미 먹고 마신 자들을 위해 그들은 소리를 낮추고 먹었다. 전선에서, 지켜져야 할 것은 지켜져야 했다. 나는 종일 고생한 화병들을 찾아 술병을 건넸다. 부족한 물자로 매번 모두를 먹일 방도를 내야 할 그들의 고뇌를 모르지 않았다. 다만 내색할 수 없었다. 그들도 나도, 그저 서로를 이해할 뿐이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내가 소망했던 조정으로부터, 내가 꿈꾸었던 세상으로부터도 나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아직 사랑하고, 소망하고, 꿈꾸고 있으므로. 나는 번민하지 않는다.



https://youtu.be/MwrnNJl3e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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