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법정에서 만인萬人이 평등해야 하는데 과연 평등한가? 나는 만명萬名만 평등하다고 생각합니다. - 노회찬
새벽녘에 짙게 드리웠던 안개는 물 끝에서 올라오는 해를 보고 삽시간에 흩어졌다. 해는 물의 끝에서 통제영까지 황금빛 길을 닦으며 느리게 떠올랐다. 바다를 등지고 돌아섰을 때 우리 뒤로 그림자가 길게 누워 있었다.
종종 소식 전하겠습니다, 장군.
그리하게.
병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권준은 떠났다. 재회를 기약할 수 없는 작별은 서러운 것이었다. 병사들은 코를 훌쩍였고 권준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다. 나랏일은 파도와 같은 것이었다. 파도는, 바다가 시키는 대로 밀려가고 밀려왔다. 파도로 사는 것은 헤어짐에 익숙해지는 일이었다. 전란 중에 가족과 흩어진 채 소식을 듣지 못하고 사는 병사들이 태반이었다. 그들의 눈물은 그리움의 파도와 같았다. 바람 불면 한 번씩 치솟는 파도. 가족을 잃은 군인들에겐 전우만이 다시 가족이었다.
권준이 떠나고 수일이 지나자 가라앉았던 통제영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삶은 늘 그러했다. 생활의 아래에 감정을 퇴적시키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오후에 전령이 다녀갔다. 문서 속에서, 왜가 침투시킨 유노 소쿠요루의 카게무샤가 동섬서홀하며 날뛰고 있었다. 유노 소쿠요루 특유의 무식함과 두서 없는 눌변, 그리고 정신 사나운 도리질을 털어 낸 그는 매끈한 얼굴과 깔끔한 언변으로 백성들을 현혹했다. 유노 소쿠요루의 신출귀몰함에 넋을 잃고 엎드렸던 백성들 사이에 서서히 의심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 백성들이 어렵게 구한 술을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는 그의 태도가 결정적이었다. 유노 소쿠요루는 술에 미친 자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노 소쿠요루의 처 기무 가니의 전력도 화제로 달궈지고 있었다. 그녀가 작부였든 아니든 그것은 내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먹고 사는 일에 귀천은 없었고, 삶엔 저마다의 그늘진 사연이 있기 마련이었다. 전란 중에 굶주린 백성들은 죽은 자식의 시체를 서로 바꿔 먹었다. 사람에게 목숨은 그토록 질긴 것이었다.
기무 가니의 천박함은 거짓으로 점철된 그녀의 삶에 감물처럼 배어 있었다. 그녀의 거짓말은 사익을 위해 남을 해코지하고 자신을 위장하여 권력을 가진 자들을 포섭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미 명백해진 그녀의 위조된 삶의 진실은 그러나 가려지고 덮어졌다. 그녀가 휘잡은 권력의 위력이었다.
허나 그녀가 작부였던 시절의 현장에 있었던 이들의 목격담은 그녀를 붕괴시키고 있었다. 기무 가니가 술과 웃음을 팔았는 지의 여부는 백성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백성들은 작부의 경력이 아니라 작부의 경력을 부인하는 그녀의 위선을 꼬집고 있었지만 매국노들에게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었다. 매국노들은 지엄한 국법을 운운하며 기무 가니를 조롱하는 백성들의 입을 단속했다.
허나 정치가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듯 백성들도 말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모두의 입을 막을 수 없기에 누구의 입도 막을 수 없을 것이었다. 매국노들이 만 명의 무사로 기무 가니를 에워싼다 하더라도 백성들은 기무 가니의 실체를 뚫어 볼 것이었다.
매국노들의 전략에는 늘 빈틈이 있었다. 이는 적이 바다에서 보인 틈과 닮아 있었다. 거짓의 장막 위에 다시 거짓의 장막을 덮는다 해도 바람결에 얼핏 드러나는 진실마저 감출 수는 없다는 것을 매국노들도 적도 알지 못했다.
바다에서 올라온 해는 산 너머로 떨어졌다. 나는 해가 어디에서 생겨나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다만 그것이 어둠에서 넘어와 어둠으로 건너가는 것임을 알 뿐이었다. 어둠의 끝을 믿는 것은 내게 해를 믿는 것과 같았다. 해를 믿지 않을 도리가 내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