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맑았다. 거울처럼 하늘을 품은 바다는 시퍼렇게 출렁거렸다. 바다 너머에서 적도 분주할 것이었다. 바다를 넘고자 하는 적에게는 놓치기 아까운 날씨였기 때문이었다.
봉화대마다 연기가 올랐고 전령은 적의 함대가 대마도에서 출격했음을 전했다. 적의 선봉이 대마도를 출발해 먼 바다를 돌아 염포를 향하고 있음을 연기가 알리고 있었다. 염포는 적의 간자와 적을 추종하는 무리가 많은 곳이었다. 허나 경상좌수영의 선발진이 염포 앞바다를 막고 부산포에서 출발하는 본대가 후미를 치면 적은 살 수 없을 것이었다. 훈련 시 약속된 대로 대응하라는 신호를 보내라고 봉수군에 명했다.
염포로 향하는 적은 미끼일 것이었다. 적은 통제영으로 올 것이었다. 적의 함대는 수천 척에 달했으나 통제영을 넘지 못하는 한 적은 바다를 떠도는 물고기떼 신세가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유노 소쿠요루는 애가 타고 있었다. 왜국에서, 유노 소쿠요루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은 날이 갈수록 증폭되고 있었다. 기무 가니의 누더기 이력처럼 유노 소쿠요루에게 덧씌워져 있던 그럴듯한 상이 벗겨진 맨얼굴에서 왜의 백성들조차 그 자의 무식과 무능의 실체를 엿보기 시작했다.
적은 전 병력을 드넓은 통제영 앞으로 진격시켜 상륙을 시도할 것이었다. 한 번의 큰 싸움으로 활로를 열고자 하는 유노 소쿠요루와 그의 수하들을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적이 산개할 지점마다 조선 수군은 그림자처럼 스며들었다.
자시에, 적은 통제영 먼 바다 위로 떠올랐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장쾌한 행렬이었다. 흑빛으로 채색된 적함들은 밤바다에 납작 엎드려 기어 왔다. 보름을 넘겨 이지러진 달빛 아래에서 적은 적의 냄새를 풍기며 음산하게 다가왔다.
방포하라.
정면에서 일자진을 펴고 있던 삼십 척의 아군 함대의 포마다 일제히 불을 뿜었다. 포탄이 날아가 닿는 곳마다 뇌전이 일었다. 장쾌한 적의 함대는 통쾌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적의 총알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지만 아군의 배에 이르지 못하고 추락했고, 그 사이 적의 배와 배는 뒤엉켜 서로를 부수고 있었다.
가난하고 무식한 조선 백성들은 자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원하지도 않기에 왜의 법으로 다스려야 먹고 살 수 있다는 유노 소쿠요루의 오만한 발언은 백성들 사이에 퍼지고 있었다. 나는 조선의 바다에 다시는 왜의 깃발이 펄럭이게 해서는 안 된다는 백성들의 염원을 담아 적의 배를 깨뜨렸다. 적의 돌격대 수십 척이 흐트러진 함대 무리를 빠져나와 전속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신호를 보내라.
대장선에서 두 개의 불화살이 적진을 향해 날아올랐다. 화살이 정점에서 내려오기 시작할 때 본대의 좌우 멀찌감치 물러나 있던 각 이십 척의 함대에서 함포를 발사했다. 적의 돌격대는 해저로 돌격했다.
거북선을 출격시켜라.
우측 함대에서 나대용이 새로 건조한 대형 거북선을 필두로 두 대의 거북선이 뒤따르며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이어 좌측 함대에서 두 기의 거북선이 추가로 적진의 우측을 가르며 적의 바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죽여라. 조선의 바다가 붉게 물들 때까지 남김없이 죽여라. 먼저 간 전우들의 넋을 위해 쏴라. 방포하라!
유노 소쿠요루의 밤이 술 없이는 밝을 수 없도록 나는 적을 몰아 죽였다. 승리에 굶주렸던 조선 수군의 악을 적을 향해 퍼부었다.
장군, 대승입니다. 적 함대의 절반이 깨지고 남은 놈들은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가고 있구만이라.
적이 달아나는 바다를 해가 끓이고 있었다. 적의 피로 물든 태양은 유난히 붉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유노 소쿠요루에게는 이제 죽음을 향한 외길 만이 뻗어 있었다. 그 길에서 유노 소쿠요루는 기무 가니와 그녀의 어미와 함께 돌아올 수 없을 것이었다.
소쿠요루야, 이 나라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너는 무엇을 했느냐? 너는 무엇을 했기에 왜와 손을 잡고 나의 조국을 죽이려 든 것이냐? 너는 살아서 다시는 이 바다를 넘보지 못하리라.
날이 밝았다. 하늘처럼 해를 품은 바다는 시뻘겋게 일렁거렸다. 바다 너머에서 적은 분주할 것이었다. 다시는 바다를 넘을 수 없는 적에게, 언제고 바다를 넘을 수 있는 조선 수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