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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Jan 19. 2022

일상의 논어 <위정爲政10>-시관찰視觀察


子曰 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人焉廋哉

자왈 시기소이 관기소유 찰기소안 인언수재 인언수재


-공자가 말했다. "행동을 보고 그렇게 행동한 동기를 이해하며 그 동기의 목적을 살피면 사람이 어찌 숨기겠는가 사람이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공자가 사람을 판별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소이所以'는 '하는 바'이니 행동으로 풀이하면 됩니다. 사람은 평상시 생활할 때나 일할 때 저마다의 고유한 행동 양식을 겉으로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아도 일을 풀어가는 방식이나 일에 임하는 태도 등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지요. 이것이 시視입니다. 하지만 눈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시각 정보를 타인에 대한 판단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 것은 위험하지요.  


그래서 '소유所由'를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고 공자는 얘기합니다. 소유는 '말미암은 바'이니 동기, 원인의 뜻입니다. 사람이 특정한 행동을 할 때는 반드시 그 행동을 추동한 정신적, 환경적 배경이 있다는 것이지요. 주의를 기울여 그것을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관觀입니다. 


안安은 '편안하다', '즐기다'의 개념이니 '소안所安'은 '편안한 바, 즐기는 바'가 되지만 이 상태로는 의미가 매우 모호합니다. 결국 어떤 행동을 일으킨 동기의 기저에는 반드시 자기가 얻거나 누리고자 하는 이익, 쾌락, 만족 따위의 목적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소안'입니다. 따라서 행동의 동기를 알게 된 것이 관觀이라면 찰察은 그 동기를 갖게 된 근본적, 본질적 목적을 추론하는 것입니다. 목적이란 한 사람의 철학과 관련된 것이지요. 


시관찰視觀察을 각각 응시凝視, 관찰觀察, 통찰通察의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곧 '바라봄, 살펴봄, 내다봄'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공자의 '행동-동기-목적' 3단계법을 통해 규정된 한 사람의 실체는 그를 오롯이 대변하는 것일까요? 그를 응시, 관찰, 통찰하는 개인의 주관이 개입되기 마련인 현실에서 판단의 오류 가능성은 무시해도 좋은 것일까요? 우리는 아래의 공자의 사례에서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의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제 글 <담백한 주역>의 24괘 지뢰복괘 초육 효사에 대한 설명 중에서 인용하는 내용입니다.


공자 일행이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고생하며 일주일 간 쫄쫄 굶고 있었던 때의 일입니다. 안회는 스승의 끼니를 잇기 위한 쌀 동냥에 이골이 난 제자였지요. 안회가 어렵게 쌀을 구해 밥을 지었는데 낮잠을 자다 깬 공자의 눈에 언뜻 안회가 갓 지은 밥을 손으로 한 줌 집어 먹는 장면이 들어왔습니다. 안회가 밥상을 차리자 공자가 말하지요. "방금 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뵈었다. 깨끗한 이 밥으로 제사를 먼저 지내야겠구나." 안회가 답합니다. "안 됩니다. 솥에 재가 들어가 밥이 좋지 않게 되어 버려야겠기에 제가 한 줌 걷어 먹었습니다." 즉, 안회는 더러워진 밥을 스승에게 드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었기에 먹은 것이지요. 분명 자기가 먹은 만큼은 자신의 양에서 제할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이때 공자가 탄식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所信者目也 而目猶不可信 所恃者心也 而心猶不足恃 소신자목야 이목유불가신 소시자심야 이심유부족시 / 믿는 것이 눈인데 오히려 눈을 믿을 수 없고, 의지하는 것이 마음인데 마음은 오히려 의지하기 부족하구나!" 


<<여씨춘추>>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사례가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인군자라도 일주일씩 굶주리다 보면 이성이 본능에 잠식되는 것이 차라리 당연하게 느껴지지요. 오히려 공자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는 일화라고 생각합니다. 보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 있음을 곧바로 깨닫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또한 '스승이라는 자가 한심하기 그지없군'과 같이 안회가 생각했다면 두 사람의 관계에 균열이 갔을 것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공자가 '후회하는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은' 사람임을, 안회가 인간적인 면모로 그 사람의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큰 그릇이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이 일화에 담긴 공자의 자백을 통해 우리는 사람을 훤히 안다는 것은 실상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행동을 일으킨 동기의 목적에는 이익, 쾌락, 만족 등의 욕망만 깔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배려, 봉사, 희생 등의 가치가 얼마든지 바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해 동기와 목적을 파악하려는 시도의 필요성은 인정하되 그 시도의 결과물에 대해서 맹신하지 않는 겸손한 태도가 우리에게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특정인이 어떤 사람인지 밑바닥까지 훤히 알면서도 그 사실을 외면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현실입니다. 능력도, 철학도, 언변도, 자질도 없는 수구 세력의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사회와 나라의 미래는 과연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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