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종호 Feb 06. 2022

일상의 논어 <위정爲政17>-지知


子曰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자왈 유 회녀지지호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공자가 말했다. "유야, 너에게 안다는 것에 대해 가르쳐 주랴? 아는 것은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 



유由는 공자의 제자 자로입니다. 공문십철孔門十哲 가운데 한 명이지요. 안회가 인仁, 자공이 지智라면 자로는 용勇입니다. 거칠고 단순한 면이 있어 공자로부터 자주 책망을 받았지만 효심이 깊고 의리가 있어 공자가 사랑했던 제자입니다. 나이 차가 아홉 살에 지나지 않았고 특유의 외향적 기질이 있어 공자도 자로를 그만큼 편하게 대한 듯합니다.


윗 구절은 널리 알려져 있지요. 논어의 많은 대목이 그렇습니다. 유명하다는 것은 동시에 흔하다는 것이지요. 흔할 수 있는 이유는 쉽기 때문입니다. 많은 시간을 들여 수없이 곱씹어 읽으며 사유해야 하는 주역과 비교하면 논어는 사실 쉬운 책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 읽어 낼 수 있지요. 논어는 깨달음을 주는 성격의 책은 아닙니다. 그래서 논어는 사유력의 증진이나 통찰력의 획득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지요. 대신 논어는 '실천의 책'이라고 할 만합니다. 일상의 태도와 언행을 변화시키는 용도로 읽을 때 의의가 크다는 것입니다. 제가 '일상의 논어'를 글 묶음 명칭으로 택한 까닭입니다.   


논어의 내용을 누구나 생활 속에서 손쉽게 실천한다면 논어는 시대를 넘어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시공은 달라져도 인간의 본질은 바뀌지 않기에 지극히 평범하게 보이는 논어 텍스트가 생명력을 잃지 않고 현재를 사는 우리의 마음을 여전히 건드리고 있는 것이지요.


앎과 알지 못함의 구분은 간단해 보이지만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양자역학이나 명리학을 잣대로 삼으면 앎과 알지 못함의 경계가 너무도 선명해 보이지만 공자가 말하는 지知란 이런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특정 이론이나 사실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단순한 앎의 상태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니지요.


예를 들어 어느 기독교 신자에게 성경을 아느냐고 묻는 상황을 가정해 보겠습니다. 성경을 오랫동안 깊게 공부하여 성경의 모든 대목을 암기할 정도로 자신 있었던 그는 안다고 답합니다. 그에게 불경이나 코란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 그가 '그것들은 이단이요, 우상 숭배는 죄를 짓는 일이다'와 같은 뻔한 입장을 피력한다면 그는 성경을 아는 자가 아닐 것입니다. 자기 앎에 갇혀 그것 밖의 것에 대해 더욱 무지하게 되는 것을 우리가 지知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따라서 한정된 앎이 알지 못함의 영역에 대한 이해와 아량의 폭을 확장시켰음을 증명할 때, 그 앎에 대해 안다고 우리는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알지 못하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지知일까요?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법이니 알지 못한다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은 아는 사람일 가능성을 갖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가능성에 그칠 뿐이지요. 우리는 무지의 인정을 자칫 솔직하다거나 겸손하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의 무지에 대한 인정인 지에 따라 무지의 무게가 다른 것이니까요.


때로는 용어 하나에 대한 무지가 한 사람의 역량과 자질 없음을 통째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용어 하나에 대한 알지 못함은 일견 부분적 무지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누구의 그것이냐에 따라 한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정도의 심각한 위험성을 내포하기도 합니다. 일반인에게 'RE100'은 처음 듣는 사자성어 정도의 무게와 같을 지 모르지만 국가 지도자에게는 세계 질서의 흐름에 대한 이해, 미래에 대한 통찰, 국가 운영 능력의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국가 지도자를 꿈꾸는 자가 그 용어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은 그의 무지가 총체적이라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때로는 부분적 무지가 전체적 무지를 규정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성격의 알지 못함은 결코 앎의 상태로 진화할  없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알지 못하는 지조차 모르기 때문에 합리적 사고와 판단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거짓 자료와 의도된 의견들이 눈앞에 쌓여도 옳고 그름을 분간 못하는 국가 지도자가 외교 무대에 나가 국익에 도움될 협상을   있다고 믿는 것은 정신병 말기 증세입니다. 외국 정상들은 '때는 이때다' 하며 우리나라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이익을 챙기려 하이에나처럼 달려들 것이 뻔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실실거리며 언론이 포장해  사진이나 챙기 국내에서는 폭압적인 정치를 펴면서 부정과 부패를 일삼겠지요.


뻔히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무지 정도가 아니라 몰지沒知입니다. 뇌가 없다는 점에서 인간이라기 보다는 갑각류에 가깝습니다. 아는 것은 모른다 하고 모르는 것은 안다고 하는 것에 이미 능한 자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알지 못하는 것을 모른다고 하면서 갑각류들의 환심을 사고 있는 이 몰지의 시대에 위 공자의 말을 새롭게 되새겨 봅니다. "윤아, 너에게 안다는 것에 대해 가르쳐 주랴? 이는 청기와집에 가고 너는 큰 집에 가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 Cheers."

매거진의 이전글 일상의 논어 <위정爲政16>-이단異端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